침대에 기생했다. 아마도 일주일 어쩌면 머리로는 한 달 내내 침대에 맹목적으로 붙어있었다. 의식도 목적도 없이 다만 숨이 붙어 있으니 사는 것처럼 밥을 먹고 길을 걸으면서도 정신은 침대 매트리스와 이불 사이의 틈을 놓지 않았다. 내 근원이 거기인 것처럼, 늘어진 무감각만이 내가 챙겨야 할 몫인 것처럼.
처음엔 피로가 문제였다. 눅진한 감각이 피에 섞여 자꾸만 침대로 이끌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욕망도 욕망이다. 개인 시간을 포기하고 죽일 권리가 나에겐 있다. 타인에게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내가 나를 어떻게 쓰든, 내가 나를 버리든 무슨 상관인가. 물론 처음엔 피로였다. 책을 읽어나가는 것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도, 글의 시작을 구상하는 것도 모두 지쳐 그저 안락한 침대에 버려지고 싶었다. 단거리 달리기의 준비운동처럼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듯 긴장에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이내 작게 빛나는 화면과 잠에 빠져 나로서 생각하는 방법을 잊었다. 그들이 하는 말과 그들이 보여주는 배경음, 그들이 만들어내는 상징으로 내 한낮은 가득 찼다. 그러나 나는 단지 볼뿐 관찰자는 아니었고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다. 알고리즘. 그들이 만들어낸 나의 목록에 진짜 나는 없었고 그건 마치 나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미친 듯 발광하는 화면 속의 무의미. 난 그런 것이 견딜 수 없었지만 끄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큐브릭의 영화에서 결박되어 강제로 눈을 부릅뜨던 인간처럼 다만 입만을 뻐끔거렸다. 그건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새로운 종류의 수동적 폭력과 권태의 콜라보가 아닐까. 시각과 기계적인 손가락 관절의 사용만을 허락하는 공허의 환락 파티. 그리고 꿈, 지치듯 빠지는 잠에서 만나는 비각성으로의 도피. 둘 사이를 오가며 다른 생각에, 그러니까 이런 초기 우울에 빠지는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골몰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오직 핸드폰의 불을 밝혀 잠시 쾌락의 나락에 빠질 뿐이었다. 나중에는 침대가 문제인지 손에 드는 기계의 문제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나는 나를 제대로 버린 것 같았다.
그것은 도파민이라고 한다. 스쳐 지나가는 짧은 영상과 그림 클립들에서의 쾌락은 뇌의 어디에도 남지 않지만 호르몬에는 영향을 끼친다. 순식간에 자를 수도 없는 호르몬을 두고 점점의 시간 동안 베란다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려 했다. 읽다가 보다가 보다가 읽는 척하다가 다시 보다가. 며칠에 붙은 습관도 무섭다. 타인이 작정하고 만들어 놓은 무한대의 쾌락은 이미 정도를 지나 아무런 목적이나 뜻도 없이 그것을 찾게 했다. 보면서도 보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난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울고 싶어졌다. 차곡차곡 쌓인 무의미들이 산사태처럼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시작이 피로였고 주동근이 도파민이었다면 그 저변에는 무기력이 있었다. 뭘 해야 할까에 앞서 뭘 한다고 나아질까라는 값이 먼저 지정되었다. 뭘 해도 나아지지 않을 양이면 더 적극적으로 뭘 해도 나아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고 알고리즘에 허덕이는 것만큼 거기에 알맞은 건 없었다.
아. 무. 것. 도. 하. 지. 않. 는. 것.
베란다에서 읽은 책 제목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었지만 사실 그 법의 기본 전제는 타인이 쳐놓은 그물 밖이라는 데 있었다. 가만히 제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와 있는 그대로의 너를 느끼고 전신으로 감각하기. 우리는 그것의 위대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식과 행동은 늘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힘든 것에 가깝다. 알지만, 이라는 서두가 하찮지만 익숙한 이유다. 그러나 역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다. 버렸던 나를 주워 담고 싶다. 너부러진 몸을 세워 말간 얼굴을 닦아주고 등을 가벼이 두드려주고 싶다. 잠시 안아주고 싶다.
뭘 한다고 나아질까 라는 말은 곧 뭘 하든 나아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품고 있다. 나아지든 아니든 즐거운 일을 하자고, 내 손과 직접의 오감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내자고 마음먹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침대 밖의 날씨와 익숙한 소리들에 귀기울이자고 나를, 나의 시간을, 나의 감각을 버리지 말자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치고 무력한 정신머리를 서걱 잘라내야만 했다.
내 경우에 침대에 붙은 정신을 잘라내는 방법은 단순하다. 머리를 자르는 것이다(당연히도 여러 정의 중 머리칼을 말한다). 사각사각. 가위와 빗과 머리카락이 만드는 소리는 여름의 빗소리처럼 시원하고, 흩뿌려지는 피 대신 짧게 잘린 검은 머리는 흰 타일 위로 쏟아져 내린다. 생각한다. 잘려나가는 것은 내게 붙은 침대의 조각이자 그들이 만들어 낸 나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고 화엄경은 말한다. 마음이 지어낸 침대와 가상의 나의 목록, 무기력, 보이지 않는 욕망.
이제는 흐트러진 침구에서 벗어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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