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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Jul 07. 2024

그러니 나는 그래서 나는



  어린 날의 유일한 꿈은 언젠가 어린 나를 잃어버린 게 틀림없을 나의 진짜 엄마 아빠가 환한 미소로 나를 끌어안고는 '자, 이제 진짜 집에 가자'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힘들었지? 걱정하지 마. 이제 우리가 있어. 나의 구원이자 희망, 구세주, 종교, 크리스마스 선물, 유일한 기도는 분명히 존재할, 존재해야 할 익명의 부모. 얼굴도 이름도 모를 그들을 나는 잠깐 스치는 것만으로도 알아볼 것이고 이미 오랜 시간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던 그들은 환호하며 나를 반길 것이다.

내가 아는 저들은 나의 부모가 아니야. 너덜한 누런 방과 소매마다 구멍 나고 찌든 옷, 가난과 결핍의 수없이 다른 형태들, 현현들. 나를 보지 않는 내 애정의 근원들. 분명 나의 진짜 부모는 멋지고 세련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일 텐데. 아 얼마나 따뜻할까, 자상하고 풍요로운 그들의 품은.

  정말이지 제멋대로다. 아빠로부터 간신히 벗어나 딱 죽기 직전만큼 일해 나를 먹이던 엄마가 알면 얼마나 우스울까. 그러나 그때 내 꿈은 꽤 생생하고 간절해서 틈만 나면 빌었다. 제발 이제 나를 돌아가게 해 주세요. 제발! 나의 '진짜' 부모에게로.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어차피 우린 종종 상상하고 만다. 외면하고 싶은 진짜의 진짜 따위 말고 허황되고 둥둥 떠다니는 꿈속 사탕처럼 달기만 한 가짜의 진짜 이야기를.


  오랜만에 우울과 외로움이 찾아왔다. 유년에는 콧물처럼 달고 다니다가 어느샌가 잊고 있던. 되는 일도 없으니 모로 누워 영화나 보자 소파에 기댔다. 제목은 말없는 소녀. 원작은 맡겨진 소녀. 처음엔 역시 원작이 낫네 하다가 결국엔 엉엉 눈물을 쏟았다. 비슷한 레퍼토리의 경험이 많다. 잘난 척하다가 호되게 혼나는 일은 뻔하고 쉽다.


  영화를 보는 내내 책이 떠올랐다. 간단한 단어와 문장, 여백, 꾸미지 않은 말들이 주던 진동과 책을 덮고 난 뒤의 여진. 어쩔 수 없이 두근대는 내 안의 유년과 씁쓸함.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맛'* 같은 글들에서 느껴지는 시적인 공감. 어쩐지 레이먼드 카버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A small, good thing>(번역을 김연수 작가님이 했는데 이 제목의 번역을 보면서도 역시 다르구나, 하고 느꼈다)이 떠오르는 따뜻함과 배려, 식탁 위의 따뜻한 차 같은 것들.

  동시에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미장센과 음성, 소리, 또는 소리의 공백도 꽤나 좋아서. 아일랜드의 풍경이나 가구, 건물, 구스베리 잼, 푸른 눈 eye이 하는 말, 우리가 익히 아는 빨간 머리 앤과 대비되는 소녀의 침묵, 낯선 아일랜드어의 발음이 만들어 내는 대화, 가끔의 낭독과 흥얼거림도. 영화는 술 같고 책은 물 같다던 이동진 평론가의 말이 떠올랐다. 둘 다를 접하고 난 지금도 책이 더 좋았다고 자신하지만 결국 눈이 벌게지도록 울게 한 건 술이 주는 휘청임과 격정과 울컥임이다.


  유년의 나에게 잘 견뎠어, 하고 말하고 영화 속 코오트에게 다행이다, 말하는 순간.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나의 아이에게 누군가의 아이에게 편안함을 위로를 배려를 따뜻함을 호사를 건넬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책과 영화는 어른들이 조금이라도 더 그런 마음을 먹게 하기 위해서라고도. 진짜 부모란,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부끄럽지만 진심이었던 나의 오랜 꿈. 어린 내가 기억을 잃은 소공녀 세라라는 생각은 귀엽고 우습지만 또 간절해서 어릴 때는 꿈에서 가짜의 진짜 부모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빠! 돌아왔구나! 엄마! 간지러워, 이제 그만 뽀뽀해! 그러나 꿈에서 깨면 방과 나는 외롭고 배고픈 그대로였다. 아직도 나의 오랜 꿈을 꾸는 아이들이 있을까. 있겠지. 없기를 바라지만 분명 어딘가에는 있겠지. 미신처럼 무언가를 비끄러매듯 믿고 싶은 마음의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 슬프다. 슬픈 걸로는 어떤 것도 나아지지 않지만 슬픈 걸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할 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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