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읽을거리

by 윤신



밤 열 시 삼십 분. 침대 옆 탁상 등 하나만 켜고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책 읽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낮의 소란은 이미 잠들었고 밤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도, 눈꺼풀이 닫히면 그대로 잠에 들 수 있다는 것도요. 살짝 배인 땀을 닦고 바닥에 드러눕다가도 다시 앉아 등을 켭니다. 매일 만나도 반가워요. 밤은 제 오랜 친구거든요.


어제 읽던 책은 초록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초록이 무성하고 초록이 맴돌고 초록이 스미는. 그런데 어디선가 어떤 소리가. 사각사각. 연필로 글씨를 쓰는 듯한, 손톱으로 나무 테이블을 긁는 듯한. 모두 잠든 밤 이소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잘못 들었나. 다시 온통 초록인 글을 읽으려는데, 사각사각.

무서웠어요. 이 시간 연필을 깎을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 거실로 나가 고양이의 잠과 침묵을 확인하고 침실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시 사각사각. 조용함을 비집고 들려오는 소음은, 목언저리를 쭈뼛 서게 만듭니다. 너, 누구야?


책에서 거듭 고개를 떼어냅니다. 떼어내기란 아주 쉽죠. 나는 그저 밤의 조용함과 책 읽는 나를 즐겼을 뿐이니까요. 달빛의 이동, 여름비의 변덕, 한밤 누군가의 고성, 고양이의 움직임. 아주 작은 핑계에도 금방 슬몃거리는 나의 시선이란 얼마나 쉽고 가벼운지.


눈을 감고 사각임의 시작점을 느껴봅니다. 왼쪽 가까이. 그것도 아주 가까이. 한번, 그리고 다시 한번 사각거릴 때까지 눈을 감고 또 처언천히 눈을 뜨고.


여기에는 뭔가가 있어야 하겠죠. 당신이 놀라거나 혹은 납득할만한 조금은 무시무시한 것이요. 아마 그런 게 진짜 여름의 읽을거리일 거예요. 으스스하게 만들고는 짜잔, 혹은 쾅하고 당신을 오싹하게 하는. 그런데 미안해요. 여기엔 그런 게 없어요. 사실 제가 쓰는 글이 늘 그래요. 스릴도 극적임도 없이, 하여튼 늘 이모양이라니까요.


하지만 돌아가보죠. 별 건 없지만 다시 그 사각거림으로. 눈을 감고 무언가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로.


살다 보면 왜 아하! 모먼트까지는 아니지만 어라? 싶은 순간이 있죠. 어제도 눈을 뜨면서 딱 그랬던 거 같아요. 아, 이거구나 하고. 어떤 것들은 시간이 조금 어긋난 뒤에야 알게 되잖아요. 아, 어쩌면 그렇겠구나. 아마도 그때는 그랬겠구나, 어쩌면, 그래 어쩌면. 시간의 간격은 다르지만 꼭 지나서야 알게 되는 그런 것들이.


실은 집에 태어난 지 두 달 정도 된 장수풍뎅이 유충이 있어요. 흰 살결아래 껍질을 잉태하고 있는, 몇 달 뒤면 거대한 뿔을 자랑할 녀석이지요. 반투명 통 안에 발효톱밥을 삼분의 이쯤 채워 넣고 톱밥을 갈아주며 키우고 있어요. 키운다기보다는 자기가 알아서 크는 녀석을 데리고 있습니다. 이름은 땅땅이예요. 얘 이름은 뭘로 할까?라고 물으니 아이가 그러더군요. 얘는 흙(사실은 톱밥입니다만) 속에서 지내니까 땅땅이라고 하자. 눈을 뜨며 아, 어쩌면 싶었어요. 그리고 침대 테이블 옆쪽에 놓아둔 땅땅이를 보았죠. 늘 흙(역시나 톱밥입니다) 속에서 꼬물대던 땅땅이가 흙(발효톱밥입니다만.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톱밥이라고 쓸 걸 그랬어요) 위에서 몸을 곧추세우고 다리를 버둥대며 플라스틱 통을 사각사각 긁는 모습을요. 깜깜한 밤을 즐기고 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봐요. 밤이다, 와! 밤이다. 땅땅이는 춤을 추는 것 같았죠.


제 이야기는 이렇게 시시하게 끝납니다. 늘 그래요. 별 것 없죠. 우리가 한낮을 살고 밤을 기뻐하고 다시 아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놀라지만 놀라움에 익숙해지고 또 여전히 엇비슷한 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하지만 어차피 사는 게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하고 일단은 그렇게 넘겨봅니다. 얼렁뚱땅. 그것도 제 오랜 친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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