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잊고 살던 여자애가 떠오른다. 잊는 것은 새파랗지도 샛노랗지도 않은 새카만 영역의 일. 책을 읽다 떠올린 여자애를 낯설다는 이유로 그 어두운 곳으로, 이 추운 겨울날 다시 밖으로 내보내지는 못할 일이므로 잠시 같이 있기로 한다. 온지도 모르게 쌓인 흰 눈을 보면서, 언제 왔어? 주어가 눈인지 여자애인지 나조차 작게 헷갈려하면서.
여자애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지만 헛수고다. 까만 눈이 생기다 말고 작은 콧구멍이 칠해지다 만다. 입은 도톰하고 컸던 것 같다. 별 거 아니다, 말하고는 웃으며 커다랗게 벌어지던 입이 어슴프레 떠오른다. 괜찮다. 다 괜찮다. 제 집이 아닌데도 스스럼없이 방 아래 붙어 있던 콘크리트 계단 밑, 널브러진 신발을 정리하고 그릇을 씻던 열 살가량의 얼굴 미상 이름 미상의 여자아이.
문장이 되고 텍스트가 되려면 써야 하고, 쓰기 위해선 재료가 있어야 한다. 소리, 색감, 형태, 이름. 그중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채 쓰인 글은 무엇을 말할 수 있나. 말할 수나 있나. 얼굴 없는 여자애를 옆에 데려다 두고 나는 어떤 말을 하려고 이렇게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나.
곁에 있는 아이가 심심해 보여 오랜만에 그 방에 들어서기로 한다. 열린 문으로 노란 미노륨 장판과 얼룩진 벽지가 보인다. 신발을 벗고 바로 들어선 실내에 펼쳐진 이불을 은근슬쩍 발로 밀고 여자애에게 두유를 건넨다. 비상식량처럼 그 집에 늘 쌓여있던 음료다. 물컵의 물때를 손톱으로 벗기는 걸 여자애가 봤을까. 해사하게 웃는 여자 아이와 마주 앉아 종이를 자르고 논다. 아니, 이제는 물을 마시고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화장실에 들러 소변만 보고,라고 적다가 지금의 나는 그 집의 화장실이 실내에 있었는지 실외에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써도 괜찮을지 의심스럽지만 여자애는 아직 여기에 있다. 얼굴도 없이 목소리도 없이 그때처럼 내 손을 꼭 붙잡고 내 옆에 있다.
종종 여자 아이는 우리 집에 왔다. 물이 오래 고여있는 골목의 사정은 어느 집이나 비슷해서 엄마가 없는지 아빠가 없는지 둘 다 없는지 서로에게 묻는 일도 놀리는 일도 없이 우리에게는 노는 것만이 중요했는데 여자애는 우리 집에 오면 그렇게 집안일을 했다. 목소리는 남아있지 않는데도 '괜찮다' 말 하나 남아 있는 걸 보면 나는 그러지 말라 했던 것 같고 그럼에도 그 아이는 계속했던 것 같다. 작고 씩씩한 몸으로 싱크대에 서서 괜찮다, 괜찮다. 뭐 줄 게 없네. 괜찮다. 할 게 없다. 괜찮다. 좀 춥지. 괜찮다. '괜찮다'라는 말은 자기 최면의 의지로 작동하거나 물에 젖은 체념처럼 내려앉는 말이다. 혹은, 떠는 몸을 덮어주는 이불 같은 것.
아이는 자꾸만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냥 '왔다'고 쓰려다가 열 살의 나이에 걸맞게 '놀러 왔다'고 쓴다. 어쨌든 기억 속 여자애는 계속 그 큰 입을 벌려 웃고 있다.
설거지가 귀찮아, 방청소 하기 싫어. 그런 말이 내 입버릇이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다. 옆에 있는 여자애에게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괜찮아, 밖에 없으니까.
짧은 골몰 끝에 흔쾌한 호의, 라 여긴다. 처음엔 그저 나를 아껴서, 그다음엔 가여워서, 또 그다음에는 그냥 같이 놀기 위한 시간을 길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다가 어찌 됐든 깊은 마음에는 호의가 있을 테고 억지가 아닌 흔쾌가 있을 거라 헤아린다. 이사를 자주 간 탓에 계속 연락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된 날에 우린 두 손을 붙들고 발을 동동 뛰며 기뻐했다. 은지, 미숙이, 보라. 이름이라도 떠올린다면 어른이 된 여자애를 다시 찾을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대신 어른이 된 내가 그 방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고 계란말이를 하고 밥을 안친다. 양파링 봉지를 찢어 펼쳐두고 오렌지 주스를 따른다. 너희들은 그냥 놀아. 제법 손에 붙은 동작으로 깔끔히 방을 정리하고 이불을 갠다. 아이들만 있는 방이 차지 않도록 불을 올리고, 별 것 아닌 일에도 넘어가듯 웃는 아이들을 그대로, 어린이의 모습으로 두기로 한다. 어릴 적 내가 꿈꾸던 상상에 어른이 된 내가 몸을 주고 옷을 입힌다.
잘 먹어야지, 잘 지내야지. 회색 슬레이트 지붕 밑의 방 안, 얼굴 없는 아이와 어린 내가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갓 만든 계란말이에서 뜨거운 김이 오른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