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다'라는 문장만 마지막에 붙으면 그럴듯한 말이 된다, 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휘청이듯 넘쳐흐르는 비와 뙤약볕에 벌겋게 데는 살갗, 초록에 잡아먹힌 듯 새파란 숲과 과즙을 뚝뚝 떨어트리는 여름. 그러다 일순 휘몰아쳐 애써 드러낸 모든 것들을 쓸어가 버리는 폭풍의 여름.
생각해 보면 지금껏 나는 겨울의 생명에게만 경이를 바친 것 같다. 가끔 오르는 산 입구에 누군가 버린 토끼 두 마리가 추운 겨울을 맨몸으로 나는 것을 보며 안쓰럽고도 기특해 당근과 배추를 들어 나르고, 흰 눈을 뚫고 피어나는 노란 꽃을 보면 생명의 전령이라도 본 듯 감탄했다. 이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일주일 만에 찾아간 산에는 토끼가 네 마리로 늘어나있었다. 남겨진 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남겨진 생을 성실히 수행한다. 폴짝폴짝 뒷다리를 세게 밀어 경쾌히 숲을 뛰어다니는 흰 토끼는 숨바꼭질 대장이다. 갈색 토끼 얼룩 토끼가 있는 힘을 다해 눈 덮인 산에서 흰 토끼를 쫒는다. 거기에 차가운 공기를 뺨 한가득 맞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겹친다. 불현듯, 아이들처럼 자연에 가까운 생명이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글은 토끼도 아이들도 아닌 '여름이었다'에 대한 이야기다. 30분만 걸어도 땀에 젖어 곤란한 8월이나 좀처럼 더위가 지치지 않는 9월이나, 그 모든 시작인 7월, 어쩌면 6월, 그냥 여름이라 불릴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 여기서 말하는 여름은 실재하는 계절이기도 각자에게 부여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계절과는 상관없이 어떤 시간은 농도와 밀도만으로 '지독한 여름'이다. 사랑이든 일이든, 어떤 타오르는 몰입이나 탈진으로 기억되는 순간. 무르익기 전 성급하게 뛰쳐나가곤 하던 순간. 맨발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달려 나가는 것만 같던 순간순간들.
7월, 여름의 시작이었다. 그땐 미처 몰랐지만 이제 막 여름 장마 같은 시간에서 벗어나던 시기다. 물에 갓 미끄러진 오리가 휘적대던 발길질 같은 시간이 지나고 찬찬히 주위를 하나씩 살펴보던 즈음. 인도네시아 출신의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안녕, 하고는 How is life treating you? 하고.
이건 사실, 십 년도 지난 문자로 나는 별생각 없이 지난 대화목록을 보던 중이어서 그런 아이가 있었다는 것과 그가 맑은 사람이었던 것, 물을 자주 마셔서 물병을 늘 지니고 다니던 것 같은 게 난데없이 떠올라서 당황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가물한데도, 요리를 하는 탓에 늘 짧던 그 아이의 손톱이나 항상 목이 늘어나 있던 그의 티셔츠 같이 쓸데없이 구체적인 것들은 희한하게도 잘 떠올랐다.
그 아이와 알던 즈음은 매일매일 바쁜 날들이었다. 보랏빛의 자카란다가 흐드러진 길을 걸으면서도, 보타닉 가든의 채도가 다른 녹음을 지나치면서도 life라든가 treat이라는 단어는 생각지도 않던 시간이었다. 잘은 몰라도 그 아이도 그러지 않았을까. 날뛰는 타국의 시간을 겪어내느라 벅찬 숨이 가쁘지 않았을까. 그래서 각자의 여름을 통과하고서 물었던 첫 질문이 How is life treating you? 는 아니었을까.
물론 저 문장은 그저 흔한 안부의 방식이다. 하지만 상상해 보라. 깔끔한 슈트를 입고 당신의 물 잔에 투명한 물을 따르는 life의 모습을. 혹은 편하게 인사하며 농담을 던지는 life의 웃음을. 어쨌든 다양한 life의 다양한 treat 방식을.
‘인생이 조금씩 나를 사랑해주고 있어.’
십 년 전 나의 말에 그는 다행이라고, 자신 또한 인도네시아에서 어쨌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지내는 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여름, 여름.
그저 여름이었다, 고 쓴다.
여름은 또다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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