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밤이 오기 전, 그녀가 한 일은 사진에 자신을 남기는 일이었다고 한다. 단정한 옷과 머리에 닫은 입술은 그녀가 가진 담백한 서술을 보는 것처럼 말끔하다. 붉은 해가 떨어지고 다시 뜨기 전. 그녀는 자신의 배에서 나온 세 살 배기 태양 같은 아이와 함께 사쿠라모치를 가는 나무젓가락으로 갈라 먹으며 웃고, 따뜻하게 데운 물로 아이의 몸을 깨끗하게 씻기며 단단해져야 해, 낮은 목소리로 자꾸만 물을 끼얹었을 것이다. 이제 막 깨어나려는 봄처럼 싱그러운 아이의 말랑한 손을 잡고 자장자장 노래했을 밤, 그녀는 아이의 길게 뻗은 속눈썹과 둥근 뺨을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생경하고도 놀라운 눈으로 오래 쳐다봤을 것이다. 영원으로 이어질 긴 밤.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바라기도 한 밤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시집 맨 뒤에는 간단한 약력이 있다.
<2월에 이혼. 3월 9일 사진관에서 홀로 사진을 찍고 딸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3월 10일 수면제를 음독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
시가 나를 멈춘 순간은 많았지만 이번에 내 숨을 멈추게 한 것은 공감이 아니었다. 아마도 옅은 분노. 남편에게 갈등의 인질로 여겨지는 딸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은 엄마와 그렇게 만든 남자와 세상. 고작 4년의 결혼(우리가 가진 여러 역할 가운데 고작 하나일 뿐인)으로도 얼마든지 흔들리고 부서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무력감.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만이 딸이 자신에게 오롯이 남는 방법이라 여겼을 그녀 안의 결단. 현재든 과거든, 슬픔이 분노로 발화되는 순간은 어디에든 있다.
엄마는 아이에게 말한다. 방울과 작은 새와 너는 다르단다, 달라서 좋단다. 그리고 정어리를 가득 잡아 기뻐하는 배 아래 어디선가는 바닷속 몇만의 물고기들이 슬퍼하고 있단다. 세상은 그런 각자의 세상으로 가득 차 있단다. 512편의 시 속에 그녀는 아이에게, 자기 안의 아이에게 자꾸만 말을 한다.
약력의 글과는 달리 그녀의 사진은 그날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원하면 바로 사진을 찍을 수 있던 시대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남기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순간. 조금 더 쓰고 조금 더 아이와 닿는 순간. 아이 옷의 해진 곳을 꿰어주고 그 작은 입이 물을 마시고 쌀알을 넘기는 것을 지켜보고 작은 산책을 하며 참새와 나팔꽃을 발견하는 순간. 칸칸의 문을 열고 닫으며 서로를 찾는 놀이를 하고 얇은 종이로 공을 만들어 서로에게 보내고 받는 순간. 몰래 숨겨둔 작은 사탕을 아이의 입에 쏙 넣어주며 웃었을, 사진보다 희미해 이내 사라질 순간순간들.
아이와 떡을 갈라 먹은 뒤 그녀는 긴 편지를 썼다. 아이는 내 어머니가 키우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진정 아이를 위한 길입니다. 남자는 더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폭력과 통제 이후 더는 벌줘야 할 대상이 사라졌으므로, 아이가 어디서 자라든 어떻게 자라든 간섭할 이유가 사라졌으므로 가볍게 두 손을 들고 뒤를 돌아 홀연히 떠났을 것이다.
무엇이 나를 두 줄에 머물 게 했나. 홀로 두 자녀를 키웠을 나의 엄마 때문인가, 아니면 백 년도 더 지난 과거가 아직도 흔한 현실과 닮은 것에 대한 슬픔 때문인가.
자료에 따르면 그녀의 딸은 90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아이는 자신의 외할머니에게서 길러져 엄마의 몫보다 훨씬 긴 생을 살았다. 딸은 엄마의 시를 읽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 글은 추측이 대부분이니 계속 이어보자면, 딸은 엄마가 마지막 입에 넣어 준 사탕을 미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던 세상에 자유를 주기 위해 엄마가 취한 행동을 애써 이해하려고도 했을 것이다. 이해하기도 전에 그리워했을 것이다. 손때가 묻도록 읽은 시는 딸의 입안 혓바닥 천장 어디든 남았을 테고, 가끔은 온갖 자연과 사물에 스민 엄마의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기도 했을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인정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영원으로 이어졌을 그녀의 마지막 밤을 영원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시간. 그녀가 지키고자 한 아이가 살아냈을 시간.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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