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흰 빛은 없다

by 윤신



1

통유리창 너머로 해무가 가득하다. 희끗한 머리의 두 여자가 창가에 앉으려는 나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들이 보던 바깥을 향해 '새하얗네요.'라고 말하자 그들 중 한 명이 나의 눈을 보고는 '예쁜 말을 하시네요, 새하얗다니.'라고 한다. '예쁜 말이네요'가 아닌 '예쁜 말을 하시네요'에서 오는 미묘한 차이에 다른 표현을 생각해 본다. 불투명하고 젖은 백색 덩어리. 두 여자는 어떤 말을 했기에 바깥으로 던진 나의 말이 '예쁜 말을 하는' 나로 되돌아왔을까. 흰 빛이라도 모두에게 같은 빛은 아닐 테지. 애초에 의도와는 상관없이 '새하얗다니'라는 문장은 여러 형태의 말로 내 머릿속에서 포말처럼 터져 나왔다.


2.


남색 플리스 터틀넥을 입고 있다. 손목에 붙은 흰 고양이 털 하나를 잡아 뽑았다. 하나 또 하나. 신경 쓰여 하나씩 떼다 보니 그만 거기에 빠져들었다. 옷 위에 내려앉은 털이 있는가 하면 도깨비풀처럼 섬유 사이에 박힌 털도 있다. 묵은 눈처럼 쌓인 털을 뽑아내며 이 일의 소용을 생각한다. 고양이들은 새하얀 배를 드러내며 거실에 드러누워있다가 이내 식탁과 책장을 뛰어다니며 털을 흩뿌린다. 후, 불면 날아갈 새하얀 죽은 털들.

그런데 털이 살아있던 적이 있나. 나는 왜 떨어져 나왔을 뿐인 것을 '죽은' 털이라 부르고 있나.


몇 번은 발에 박힌 고양이 털을 뽑으며, 내가 밟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한 적이 있다.


3.


'저요, 저요.'

그녀와 마주하거나 헤어지면서 기억하려 되뇌던 말이다. 털을 떼어내듯 어떤 말도 그렇게 쉽게 꺼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모자란 부분이 걸려 손들지 못하는 사람, 발표 시간마다 노트 가장자리를 만지작 거리는 사람,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다 결국 시기를 놓치는 사람이 있다. 다들 먼저 말하는 자리에서, 나는 끝까지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두는 쪽이었다.

그녀와 제대로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라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꿀꺽꿀꺽 마시며 지명, 책, 이름들을 오래 씹었다. 유독 그녀가 작년에 다녀왔다는 안나 푸르나는 오래 입 안에 남아 사각 얼음처럼 녹았다.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높이의 공기가, 그 이름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버릇처럼 맑은 얼굴의 사람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몸과 마음이 기운다. 그녀와 같이 있던 시간 내내 그녀의 손짓과 말투, 주근깨가 번지는 웃음 같은 것을 기꺼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쯤 '저요, 저요.'가 있었다.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왜 여태껏, 저요 저요를 못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고요. 제가 보기엔 충분히 멋진 분인데도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저도 저요, 저요, 말하려고요, 나를 더 드러내기로."


그 말을 하는 그녀 역시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라 불현듯, '이제는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저요, 저요. 신나게 손을 머리 위로 뻗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일단 해보겠다는 귀여운 주먹과 길게 뻗은 어깨, 벌어진 입. 잘하든 못하든 손을 드는 순간만큼은 이미 충분할 것 같았다. 어차피 부끄러움도 내 몫일테니 나만의 '저요'를 만들어볼까.

헤어진 뒤 그녀는 말했다. "우리의 구호로 '저요 저요'는 어때요."


4.


그녀와 걷던 해변에는 물이 다 빠져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물은 밀어들 것이고 다시 빠져나가겠지. 우린 물가를 따라 포말처럼 굳어버린 묵은 눈더미를 보았다. 눈은 조만간 녹아, 물과 눈의 경계도 없이 흐려질 것이다.


빈 바다 앞에서 우리는 운동화 끝으로 젖은 모래를 건드리며 서 있었다. 동동 거리는 발. 나는 작게 손을 들었다.

흰 것들이 천천히 쓸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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