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사람이 시를 읽는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시간의 흐름을 포기한 채로 회색 안개를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이다. 과거에는 분명하게 보는 것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눈앞의 안개 너머에 신비롭고 환상적인 것들이 있다는 걸 과거에 본 적이 있는 탓이다.
계절의 강렬한 태양 빛을 머금은 호수와 푸르른 숲의 우거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과 인위적인 소리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소리로 웅성거리는 세계가 안개 너머에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기에 나와 같은 사람이 시를 읽는다.
때로 거대한 세계가 다음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웅장한 에너지에 휩싸여 자신의 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뻗어 나아가는 빛의 힘. 사람들은 그것을 일몰 또는 석양이라고 말했다. 12월 마지막의 태양을 홀로 배웅하며 당시에 나는 지금 이 심정을 시적으로 표현해 줄 만한 시인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사진가나 화가가 와도 좋았겠지만, 반드시 시인이 왔어야 했다고 고집을 부렸다.
왜냐하면 시인이라면 분명 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특별한 힘이 있다. 그들이 빚어낸 시들은 시간의 흐름을 포기하고서 불길한 지하 세계로 가고 싶어 하는 나를 멈춰 세우고 다독여 준다. 그렇기에 나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시가 필요했다.
특히 나는 김이강 시인의 시를 맹목적으로 좋아한다. 통증이 심한 불면의 밤으로 ‘나’를 놓치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그의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읽곤 했다. 김이강 시인이 쓴 두 권의 시집 중 아무 곳이나 펼쳐 놓고 눈으로 훑거나 필사를 하면, 따뜻한 파도가 나를 감싸 안아주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비슷한 삶을 살아온 과거가 있다는 걸 느꼈기에 더욱 위로되었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시집 중에서 <12월주의자들> 이라는 시는 살아오면서 한 번 쯤, 예고도 없이 맞아본 소나기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었다. 그의 시는 모호함 때문에 질문이 많아 보인다는 평도 있다. 나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내 삶 또한 모호함 속에서 늘 방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해답을 찾지 못해 숲속을 헤매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날들의 연속이기 때문일 테다.
사실 나는 어딜 향해 이야기하는지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도무지 모르겠어요 포도는 너무 예뻐요 농약이 묻어 있을까봐 흐르는 물에 오래 씻은 컴컴한 보랏빛 포도 포도는 신사임당을 떠올리게 해요 치마폭에 그려진 포도 어릴 적 삽화에서 보았거든요 신사임당을 쓰자마자 갑자기 불안해져요…… 「12월주의자들」중에서.
이런 시를 읽으면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시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게 된다. 시가 없다면, 시가 없는 나의 세계는 상상하기 싫다. 눈이 부시는 환상적인 과거가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다. 불안한 지하세계로 첨벙 빠져서 절대 나오지 못할 테다. 끔찍해서 양팔에 소름이 돋는다.
어쩌면… 이것은 왜곡된 시를 향한 나의 집요한 결핍일 수도 있다. 흐트러진 삶을 바로 잡고 싶다는 열망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를 읽는다. 시를 읽어야만 내일의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