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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이로움 Jan 10. 2021

여행의 묘미

글쓰기를 위한 글감 노트(1)

한때 여행 작가를 꿈꾸던 스물넷 여자는 현실이라는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섬으로 떠내려갔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천에 널렸고,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선 인맥이 필요하고, 글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족하기 짝이 없다. 여러모로 그녀에게는 실패한 안타까운 사연이 있어 보인다. 아니다. 사실 다 핑계였다. 애초에 시도하지 않았으니 실패조차 할 수 없다. 포근한 2014년 4월 말, 제주에 도착했다. 계절을 의심하게 되는 두꺼운 코트, 보폴이 가득한 털모자, 거기에 몸집만 한 배낭과 30인치 대형 캐리어를 낑낑 끌고 가는 위태로운 자세까지. 누가 봐도 집 나온 서울 여자였다. 제주 시에서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50분 정도 걸려 도착한 동쪽 어촌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다니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첫 제주살이의 순간이다.


대단한 계기는 없었다. 야근과 철야를 반복하던 첫 회사에서 퇴사한 직후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처음에는 5박 6일 나 홀로 제주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네이버 카페에서 아는 게스트하우스의 스텝 모집 게시물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누구나 그렇듯 ‘제주살이’하면 청춘들의 로망을 떠올리니까.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녹록지 않았다. 4명의 스텝이 돌아가면서 당직을 섰다. 오전 6시 오름 투어를 다녀오면 8시 조식 정리를 돕고, 10시 퇴실 시간에 맞춰 방 청소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4시 입실 안내를 한다. 그리고 7시부터 시작하는 바비큐 파티를 위해 앞마당에 있는 로즈마리를 따고 막걸리를 사러 간다. 첫날부터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일거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얼빠진 얼굴로 걷다 보니 간판도 없는 허름한 슈퍼 앞에 도착했다. 페인트로 대충 써놓은 ‘윤하 슈퍼’, ‘담배’, ‘낚시’만 보았을 땐 망한 줄 알았는데, 동행한 스텝은 자연스럽게 쇠문을 열며 인사를 건넨다.


“삼춘~ 막걸리!”

“기여! 그거 앗아도라(오냐! 그거 가져다 줘라)”


제주에서는 성별 구분 없이 어르신을 ‘삼춘’이라고 부른다. 육지에서는 작은아버지를 부를 때 ‘삼촌’이라는 호칭을 써서 낯설면서도 정겹게 느껴졌다. 입에 착 붙어서 자꾸만 부르고 싶었다. 물론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날로부터 6년 동안 11명의 삼촌이 생길 거라곤. 슈퍼 삼촌은 좋은 인상만큼이나 정이 넘치셨다. 덕분에 일상에서 많이 쓰는 제주방언을 배우기도 했다. 슈퍼 안은 빛바랜 달력과 날 것 그대로의 시멘트 벽, 여유롭게 진열된 물건들이 전부였다. 이곳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꼭 필요한 것들만 골라 파는데, 어제는 있고 오늘은 없는 물건이 대다수라 미리미리 쟁여놔야 했다. 그래도 막걸리는 항상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매일 오후 6시 일정한 시간대에 과자와 막걸리를 사러 가다 보니 나중에는 하루 걸러 가면 어제는 뭐 했냐며 안부까지 묻는 사이가 됐다.


제주살이가 적응될 때쯤 쉬는 날마다 동쪽 여행지를 부지런히 다녔다. 어느 날은 만장굴에 갔다. 세계적 규모의 용암동굴인 만큼 제대로 알고 싶어서 해설사 동반을 신청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건물 안에서 슈퍼 삼춘이 나왔다.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입을 쩍 벌린 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세계 자연유산 해설사’라고 적힌 명찰을 보여줬다. 그제야 낮에는 해설사를, 밤에는 슈퍼 운영을 한다는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알게 됐다. 아, 이 삼춘의 반전 매력은 어디까지인가. 존경의 눈빛을 보내서인지 다수가 아닌 소수 인원으로 만장굴 해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친근함과 반가움도 잠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슈퍼 삼춘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탐방에 앞서 만장굴의 형성 과정, 지형적 특징을 관광객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데 집중한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각별했다. 해설사 삼춘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자연이 만든 경이롭고 신비로운 예술 작품이 펼쳐졌다.


해설이 끝나고 삼춘과 함께 퇴근을 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그림자처럼 짙고 긴 대화를 나눴다. 삼춘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제주를 위한 일들을 고민하고,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상이 점차 가치 있는 하루로 채워졌다고 했다. 특히 만장굴은 매일 봐도 새롭고 안내판 너머에 수많은 이야기가 남아있어 생생히 알리고 싶다는 말에는 진심 어린 굳건함이 전해졌다. 온몸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삼춘이 부러웠다. 그날 나는 행복의 기준을 하나 더 깨달았다. 짧고 강렬했던 제주살이는 아직까지도 삶의 지표가 되어준다. 매일 아침 해양 쓰레기를 줍는 카페 삼춘에게 따듯한 성실함을, 간식을 챙겨다 주시는 농부 삼춘에게 부지런한 자상함을, 자신의 고향을 사랑하는 슈퍼 삼촌에게 대담한 진솔함을 배웠다. 지금도 제주에 가면 스물넷의 내가 마중을 나온다. 또다시 나아갈 힘을 실어 온다. 어쩌면 그게 진정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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