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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Jul 24. 2021

[일상의 단상]-<대화의 이익>

*원만하게  의사소통하며 유쾌하게  살아가자.*


[일상의 단상]-<대화의 이익>


*원만하게  의사소통하며 유쾌하게  살아가자.*


사람들 간에 서로 소통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말'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대화'가 가장 보편적인 소통의 방식일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가능한 지적인 소통방식이다.


나는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에 못지 않게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하고 즐거움을 느낀다.

요즘은 코로나19 판데믹의 어려운 상황을 살고 있기에 우리의 일상이 모두 변해가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는 것이니, 친구들이 많고 여행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분들에게는 참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코로나19 발발 이전에 활동하고 있던 몇몇 모임이 정지된 상태로 어느덧 해를 두 번 넘기고 있다.

오프에서 만나 모임을 갖는 일을 되도록 조심하며 지내다 보니 지인들 간에도 자연스럽게 만남이 줄어들게 되었고, 그런 상태가 장기화되어가다 보니 외로움의 감정이 치고 올라오는 순간도 문득 느끼게 된다. 그래도 나에게는 '’책과 영화와 글쓰기'’라는 참 좋은 취미가 있어서 혼자만의 시간을 현명하게 만끽해야 할 이 시절에 큰 위로가 되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을 하며 살아가게끔 구조화되어 있는 모양이다. 아무쪼록 가족들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 나 자신도 스스로를 돌보는 습관을 들이며 변화된 생활에 어느 정도의 패턴이 생겼고, 어떤 식으로든 나름대로 적응해 나가게 되었으니 다행스럽다.

코로나 이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던 보통의 일상을 멈추어야 하는 순간들이 생겼지만, 시간은 끊임없이 잘도 흘러가고 있다.


무심하게 지나가는  판데믹의 세월 속에서 최근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한 인연이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사람이었는데, 싱글로 살아온 분이라 그런지 일을 하며 가정도 돌보아야 하는 기혼여성인 나에 비해,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내 한 몸만 잘 챙기면 된다'라고 공공연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여러모로 나와는 참 다른  분이었다. 특히 시간적으로 자유로웠던 탓인지 자꾸만 나를 만나고 싶어했고, 나와 뭔가를 함께 하는 활동들에 대해 꽤 즐거워하셨다. 어느 날은 다른 분이 함께 합류한 때도 있었는데, 나와의 만남에 적극적이었던 그녀 덕분에 어쩌다 보니 두 달여의 기간 동안 꽤 여러 번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를 만날수록 자꾸만 마음이 불편해지고 지치고 소진되는 듯한 피로감이 올라왔다.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풍기는 인상이나 말투에서 뭔가 마른 나뭇잎이 으스러지듯 메마른 느낌이 들었고, 특유의 딱딱 끊어지고 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투가 상당히 거슬렸었으나, 나와는 워낙 나이차가 많이 나기에 나에게는 연장자이며 어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썼고, 되도록 맞춰드리며 최선을 다해 잘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특히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툭툭 끊고 끼어들기를 하거나 말의 꼬리를 잡고 따지듯이 말하는 그녀의 직설적인 화법에서 순간 화들짝 놀라기도 하며 만정이 떨어질 정도여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첫인상이나 나이에 대한 선입견을 되도록이면 갖지 않고 그 사람 자체만을 보려고 노력하며 살고 싶었기에,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만남의 횟수를 더해 갈수록 그분의 고착화된 어투와 주로 사용하는 용어들, 그리고 대화의 주제로 삼는 스토리 등, 나와는 너무 결이 다른 소통의 태도에서 불편함이 누적되면서 그 대화가 나에게는 스트레스의 중첩일 뿐 어떤 이익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의 만남에 그만 마침표를 찍고 싶은 내 의사를 솔직하게 표현하였고, 짧은 인연을 여기서 그만 멈추기로 했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 관계의 종결을 선언할 때에 상대방으로부터 되돌아 오는 비난과 원망으로 점철된 피드백에 의해 본의 아니게 갈등 상황에 휩싸이는 어려움을 맞닥뜨려야 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뭐라고 누군가를 거절하고 밀어내는가!에 대한 인간적인 미안함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나 상처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나의 생각을 완곡하고 정제된 '말'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세심하게 애쓰며 집중력을  발휘하느라 밀려드는 피로감을 감수해야 했다.

어쨌든 그동안 상대에게 무조건 맞춰주던 ‘서비스 마인드’를 내려놓고, 나 자신을 중심에 둔 채 내 마음속을 들여다 본 후 스스로를 먼저 돌보려는 시도를 해 볼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은, 나이를 먹음에서 얻게 된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듯 예전보다 발전하고 성숙해진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 또한 감사했다.


그녀와 인연을 맺었던 두 달여 간의 짧은 만남을 계기로 사람들 간의 '대화'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친구관계를 맺고 그 인연을 유지시켜 나가는 데에는 서로 주고받는 '말의 품격'과 상호간 '대화의 이익'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에 관해서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좋았든, 나빴든, 그 어떤 경험이든, 그것을 통해 배우게 되는 통찰이  분명 있고 의미롭게 남는 깨달음이 있으니,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은 삶을 좀 더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데 토대가 되는 자양분임에 틀림이 없다.


중국으로부터의 티베트의 독립과 자치권 확대를 주장하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는 [대화의 이익]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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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이익]


당신이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자신이 아는 것만 반복하게 되지만

만약 듣는다면

당신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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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의사소통’이라고 되어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가족, 친구를 비롯해 잘 모르는 사람들과도 여러가지 형태의 대화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글과 말은 물론이거니와 표정과 몸짓, 발짓 등의 바디랭귀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대화를 하게 된다. 그 모든 대화들이 궁극적으로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화에 있어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대화할꺼리가 필수적으로 공존하게 된다. 대화를 통해 어떤 느낌이나 생각, 의도를 서로 제대로 전달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때와 장소, 그리고 대화 상대에 따라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함을 비롯해서, 대화 상대방에게 결례가 되지 않도록 하되 내 의사는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누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각종 처세술과 스피치에 대한 수많은 저서들과 강연들이 유행처럼 여기저기서 성행하고 있다. 이 또한 소통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고난도의 감각인가를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사람이 귀가 두 개, 입이 하나인 까닭은 말하기보다 잘 들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연결지어서 경청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위에 발췌한 달라이 라마 명언의 속뜻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아도 일맥상통한다.

한편 내가 말하며 아는 것만 반복하기보다, 잘 들으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므로, 말하기보다 잘 듣는 것이 좀 더 얻는 것이 있는 대화의 이익이라고 해석하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의 오류일 것 같다. 대화를 함에 있어서 대화의 양 당사자인 서로가 이익이 될 수 있어야 바람직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에너지가 많던 젊은 날에는 상대방에게 맞춰주며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고 잘못 생각했었다. 마치 ‘착한 아이 콤플렉스’와 같이 무조건 '예스맨'이 되어 상대방에게 나를 맞추며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미덕인 듯이 착각하고, 잘못 배어든 친절 습성으로 인해 마음고생한 경험도 해봤다. 사람들이 다 내 마음 같지도 않으며 모두가 교양 있는 사람이지는 않다는 것과, 때때로 상대방의 착함과 순함을 악이용 하는 영악하고 못된 사람들도 있다는 불편한 현실을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아가게 되었다.


예의 있는 자세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내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 보태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소통이 진정한 대화의 이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 말만 많이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며 귀 기울일 줄 아는 여유로움을 갖는 것이 서로 대화하는 이익이 되고 소통이 의미로울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흔히들 ‘저 사람은 도무지 말이 안통한다’고 말하며 답답해하는 경우가 있다. 대화가 잘 안되어 소통이 어려우면 '대화의 이익'은 고사하고 답답함이 극에 달해 그만한 고통이 세상에 또 없다. 때로는 상대방의 무례함에 불쾌하거나 황당스럽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말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라는 속담과 같이 대화를 할 때 의사표현은 명확하게 하되, 되도록이면 고운 말을 골라서 예쁘게 말하는 교양인으로 살고 싶다.

일상 속에서 만나고 대화하고 교감하는 사람들과 유익하고 편안한 대화를 많이 나누고 원만하게  의사소통하며 유쾌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늘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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