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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Jul 29. 2021

[일상의  단상]-<‘돈’의 존재에 관하여>

*‘돈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


[일상의 단상]-<‘돈’의 존재에 관하여...>


*‘돈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


오늘도 이 세상에서는 갖가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안에서나 해외에서나 계속되는 사건사고로 인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일이든 촉발하고 해결하는 루틴의 반복인 것 같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만 보더라도 도대체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모를 흉악하고 희한한 일들을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되는데, 그런 일들의 원인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그 끝에서는 결국 ‘돈’의 문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흔하디 흔하다. 사람들은 ‘돈’으로 말미암아 슬프고 기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심하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도 포기해 버리게 되기도 한다.


갑자기 왜 ‘돈’에 대한 이야기를 풀고 싶어졌느냐? 굳이 이유를 찾자면 최근에 ‘돈’으로 인해 고민이 깊어지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 지인이 오랜만에 전화를 하여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였다. 그녀는 오래전에 내가 일했던 직장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이직을 하기 위해 그간 하던 일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하던 일을 승계해 줄 후임으로 왔던 그녀에게 일을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꽤나 밀착된 교류를 했던 사이였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지만 나에게 일을 배워야 하는 입장이었고, 후임이 오지 않으면 제 때에 일을 정리하고 빠져나가는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걱정하던 차에, 너무 늦지 않게 후임이 들어온 것에 나는 안도했다. 그래서 실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기본 ABC는 물론이고 일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라 할만한 나만의 필살기인  고급 스킬까지 성심성의껏 잘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였는지 그녀는 나를 무척 좋아했고 실제의 나보다 훨씬 더 실무능력이 유능한 사람으로 고평가 해주었던 것 같다.

내가 이직을 하여 직장에서는 더이상 만나지 않게 된 이후로도 그녀는 일적인 부분에서 뭔가를 추가적으로  묻거나 가벼운 안부 연락도 해왔고, 그 시간들이 쌓여 사적인 만남도 이어가게 되면서 우리는 지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자연스레 나누게 되었는데, 그녀는 종교에 심취해 현실을 초월한 듯 혼자만 고고하고 거룩한 인생을 살면서 가장의 역할은 전혀 하지 않는 무능한 남편으로 인해 늘 경제적으로 곤란함을 겪으며 ‘돈’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입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산골소녀로 자라났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비롯해 부모 형제와 관계에서의 결핍에 대한 아주 은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아 주었는데, 그녀의 스토리를 들으며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 속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당장 제일 크게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가장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매어 있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현재를 제대로 못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나, 여튼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가 바로 그 사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게 보편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경제적으로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한 그녀와 나누는 대부분의 대화는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는 때가 많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이도 어리고 사람들과의 처세에 대해서도 미숙했던 나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까지 보태어진 진심으로 안쓰러운 마음을 내어 그녀의 하소연을 잘 들어주었고, 만나면 되도록 밥을 내가 사려고 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연민을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황이 너무 급하다며 몇십만 원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그녀의 딱한 사정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아주 큰돈은 아니었던지라, 얼마간의 돈을 빌려주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내가 왜 그렇게 잔정에 이끌리며 맺고 끊고도 제대로 못했던지, 참 어리숙하고 어렸던 시절이었구나 싶다. 당시 그 돈을 돌려받기까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마음이 쓰였던 기억이 지금 생각해도 유쾌하지 않다.

‘돈은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는 말도 있듯이 돈거래는 서로의 관계를 참 복잡 미묘하게 만드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빌려준 돈에 대해서는 말도 못하고 그녀의 처분만 바라보듯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느껴야 했던 서운함이 괘씸함으로 변하는 과정을 자각하는 순간이 속상했다. 그래서 그냥 그 돈을 떼인다 하더라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며 그만 마음을 접기로 결심하고 그녀에게  그 돈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을때 그녀는 그 돈을 돌려주었다. 내게서 빌려간 그 돈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던 기간에서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돈을 돌려주면서 구구절절 변명이 많았지만, 약속한 기간을 아무말 없이 넘기면서 나에게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믿음을 저버린 시간으로 인해 내가 마음이 어려워졌었던 경험이 무척이나 싫었었기에 더이상은 그녀를 위한 이해와 호의의 마음은 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이미 신뢰에 금이 갔고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철’이라는 말이 있듯이 번번이 ‘돈! 돈!’ 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고, 연락을 받는 횟수와 만남의 자리도 차차 줄여가게 되면서 그렇게 우리는 차츰 멀어져 갔다. 이후로 간간히 명절이나 특별한 날의 인사가 메시지로 오면 나도 예의상 축복의 의미로 의례적인 회신을 보내며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는 정도의 ‘그냥 아는 사이’로 애매하게 걸쳐져서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연락을 하는 그녀의 꾸준함은 높게 평가할 만 했다.


그런 그녀가 뜬금없이 전화를 하여 고작 한다는 말이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사정이 급하면 저럴까 싶고, 시간이 흘렀어도 삶의 모습이 발전이 없는건 아닌가 하는 짐작에  딱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지는 않았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나에게 저런 말들을 쉽게 꺼내놓을 수는 없었을 상대방의 딱한 처지와 입장이 안쓰럽기도 하였고 흔쾌히 들어줄 수 없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녀와 나의 현재 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합당한 일이 아니라는 직관이 치고 올라왔기에 거절이 고민스럽지는 않았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통화가 오랜만이었기에 그간의 근황을 물었고, 그녀의 기나긴 여차저차 하는 말을 충분히 들어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 한켠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떤 말로 위로를 전하면서 거절도 잘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는 거절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완곡한 표현은 쉽게 찾아지지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돈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돈’이 사람을 당당하고 우아하게도 만들고, 초라하고 비굴하게도 만든다. ‘돈’이 가정을 행복한 상태로 지속시켜 줄 수도 있고, 행복했던 가정을 파괴시켜 버릴 수도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속에서도 ‘돈의 존재론’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들을 이야기의 바탕에 깔고 있는 것들을 꼽아 보자면 그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이니만큼, ‘돈’이란 인간의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게 밀접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돈’으로 인해 사랑도 배신하고 ‘돈’으로 인해 우정도 깨진다. 돈의 효용에 관해 말하자면 입이 아픈 일일테고, 돈을 무시하고 싶어도 도저히 무시할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 생활인들의 입장일 것이다. 심지어는 ‘명예’와 ‘권력’조차도 ‘돈’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명예’를 가진 식자층이나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돈’으로 들이대는 협작꾼들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그간 어렵게 쌓아온 자신의 캐리어를 한순간에 잃기도 한다. ‘돈’이 사람을 무너뜨리고 망가지게 할 수도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힘의 원천이 되었으니 뭔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자본주의의 폐해를 제대로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돈의 힘’이 그토록 센 것이 맞다손 치더라도, ‘돈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보다 중요할 수가 있을까?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돈’이 가치로울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보조수단으로써 작용할 수 있는 때이니만큼, 결국은 ‘돈’ 위에 ‘사람’이 있어야 순리일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돈’의 존재에 관하여 ‘효용’의 관점에서 시작해서 ‘성찰’의 대상으로 놓고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돈’으로 인한 수많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성직자의 반열에 오를 만큼 도를 닦아 깨달은 인간이 아닌 이상, ‘돈’에 대해 본질적으로 성찰해 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렵더라도 ‘돈’에 끌려다니지는 않을 정도의 자기중심은 잡고 살 수 있도록 ‘돈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려는 노력만큼은 하며 살아야겠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돈벼락을 맞고 싶다’ 거나 ‘돈 세다 죽고 싶다’는 우스갯소리들을 농담으로 하기도 하는데 돈이 아주 많다는 것이 과연 축복일까? 사실 사람이 일상생활을 해나가는데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나는 가끔 해보기도 했다. 재벌이라고 해서 하루 세끼 이상을 먹고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사치의 끝판왕이라 일컬어질 만큼 온갖 비싼 것들로 외적인 치장을 한다고 한들 한꺼번에 여러 개의 옷을 겹쳐 입거나 많은 가방과 장신구들을 여러개 겹쳐서  주렁주렁 몸에 부착하고 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돈’이 너무 없어서 생존의 위협을 받는 것은 분명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한편 ‘돈’이 너무 많아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니 너무 욕심 사납게 ‘돈’의 노예가 되어 인간다운 삶에서 멀어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사회주의냐, 공산당이냐, 왜 내것을 빼앗아 가서 나눠주려고 하고 도대체 이게 뭐냐’ 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평균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벌거나 원래 많은 ‘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소득과 재산에 맞게 세금을 많이 내고 기부도 활발하게 하면서, ‘돈’이 너무 없어서 고통받는 사회 소외계층에게도 삶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이 닿도록 하는데 토대가 되어줄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듯하다.


한편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제대로 기능하게 되는 데에도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아이가 성장해 성인이 되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는 시점이 오더라도, 본가에서 나가 주거만 분리되고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보조를 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생활비를 감당해 낼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인 독립을 전제로 진정한 독립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만큼 ‘돈’은 사회 구성원으로 온전히 존재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모든 것의 우위에 설 수는 없다. ‘돈’이 삶의 ‘도구’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돈’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면서 ‘돈’을 활용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상생할 방법을 찾아 나간다면, 최소한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비트코인, 주식, 부동산 투자’ 등에 이른 나이의 열정을 몰입하는 바람에, 가장 젊고 반짝거리는 젊은 날들을 ‘돈’에 투신해 버리는 요즘 일부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세태를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불현듯 한국영화 100년사 최초로 2019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고,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 등 4개 부문에서 상을 받아서 전세계적으로 신드롬에 가까운 관심을 집중시킨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생각난다. 당시 멀티플렉스 개봉관에서 관람했었을 때 영화친구님들과 함께 관람하고 영화토크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핵심 주제는 결국은 ‘돈’과 직결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송광호 배우의 아들 역을 맡았던 최우식 배우는 아버지에게 “근본적인 대책이 생겼어요. 돈을 아주 많이 버는 거예요.”라고 말했고, 엄마 역의 장혜진 배우는 “부자는 다 착하더라. 돈이 다리미라고, 돈이 주름살을 쫘악 펴줘.”라는 대사를 세상만사 초월한 듯 리얼하게 말했다.

‘돈’을 아주 많이 벌면 계급 상승도 가능해지고 행복도 당연히 따라올 뿐만 아니라 만사가 해결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된다고 생각하는 아들의 말은, 우리 현실에서 ‘돈’이 얼마나 막강한 파워인지에 관한 인식과 ‘황금만능주의’의 모순된 현실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일까? 아니면 인생에 대한 통찰이 아직은 부족한 젊은이가 잘못 생각하고 착각하는 것일까?

돈이 다리미처럼 주름살도 쫙 다 펴주고, 사람을 착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는 엄마의 말은, 돈이 많은 부자는 돈으로 인한 괴로움이 없으니 악따구니 쓰며 각박하게 살 일이 없으니 모두가 착한 사람의 모습을 연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비꼬는 척하며 부러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돈이 많으면 착한 마음 따위는 저절로 낼 수 있다며 결국은 인성도 ‘돈’으로 해결될 만큼 ‘돈’이면 안되는 게 없는 자본주의 세상을 비판하는 것인지!

국제무대에 나가 수많은 상을 받으며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탄 영화답게 곱씹어 볼수록 예리하게 현실을 풍자하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지는 않으면서 웃긴데 슬프기도 한 현실의 리얼한 모순을 티안나게 은근히 ‘돌려까기’하듯 유머로 승화시키는 감독의 센스가 돋보이는 영화였다. ‘돈’에 대해 고찰해 보는 순간에 이 영화를 다시 소환해 와서, 사람들이 현실 속 모순을 직.간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잘 만든 수작이라는 생각을 한 번 더 새롭게 하게 된다.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돈’을 빌려 달라던 지인과의 대화는 ‘돈’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백의 나이가 코앞인데도 아직도 무엇이 정답인지 헷갈릴 때도 많고 어떤 것이 좀 더 현명한 선택일까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된다. 때때로 잔정에 이끌리거나 어줍잖은 연민으로 결단을 내리기 어려워 좌충우돌할 때도 많다. 변한 게 있다면 그런 내적 갈등들을 밖으로 너무 티내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심사숙고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나름의 경험치가 높아짐으로써 처세도 조금은 노련해지고, 일이든 인간관계든 맺어야 할 때와 끊어야 할 때를 직관적으로 어느 정도는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나이를 먹음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인 듯하다.

한편으로는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해볼 정도로 내가 남들 보기에 그리 없어보이지는 않는가 보구나 하는 유치한 안도감이 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고, 내 생활이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누군가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벌고 있고 갖고 있어서 그럭저럭 먹고 살고는 있는 평범한 나의 현재가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사실 나는 명품을 좋아하거나 사치를 하는 사람들에 비해 크게 돈 쓸 일이 없는 지극히 소박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평소 일상생활을 하는 것에는 그다지 큰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낄때가 많았다. 살다가 불현듯 찾아오는 큰 변수가 없는 한,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생활에 필요한 '돈'을 사용하고 난 후 저축도 하며 살아 왔다. 때로는 내가 모아 놓은 돈을 부모 형제가 쓴 일도 있었다. 갑자기 급하고 딱한 사정에 처한 핏줄의 어려움을 알고도 그냥 지나쳐 버릴수 없어서 나의 '돈'을 자발적으로 내어 놓았던 터였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는 내가 직접 사용하는 '돈'이 아닌 통장 속의 '돈'은 그저 내 명의라고 규정지어진 숫자일 뿐, 어쩌면 그 '돈'은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돈'을 실제로 사용한 사람의 것이 아닐까 하는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이해로 받아들임으로써, 때마침 나에게 내어줄 수 있는 '돈'이 있어서 도울 수 있었으니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내 '돈'을 가져다 쓴 가족의 안녕과 행복만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었다.


매스컴을 통해 재벌의 불행한 말로와 순탄치 않은 죽음을 목도하면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도 아니며, 현재의 삶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만족감과 결핍을 느끼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이기는 하나, ‘삶의 가치’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고 삶은 스스로의 주관과 가치관을 갖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아무리 ‘돈’이 최고의 가치인 듯한 자본주의의 절정을 일상 곳곳에서 매일 접하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돈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아무쪼록 ‘돈’에 너무 휘둘리지 않고 ‘인간의 존재’ 위에 ‘돈의 존재’를 놓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돈’으로 계산이 불가능한 ‘인간’과 ‘삶의 가치’에 대해 성찰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나 어색해하며 인사를 나누었던 그옛날 그날이 떠오른다.

아무쪼록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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