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연구실엔 귀신이 산다.
그리고 귀신이 머무는 곳에 선 사람마저 미쳐간다고 했던가. 나는 서서히 미쳐가는 중이다. 광증은 아침부터 서서히 올라 점심을 거쳐 점점 심해지다 저녁이 되면 터져 나온다. 그렇지만 아직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 아직 해야 할 실험이, 읽지 못한 논문이, 쓰지 못한 보고서가 남아있다. 그리고 저기 다른 곳에선 귀신보다 무서운 교수가 캠퍼스 한쪽을 배회하고 있다.
저녁만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한쪽 어깨가 결려오고, 일도 잘 되지 않고, 연구실로 들어가는 것이 싫다면 연구실에 귀신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연구실을 돌아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모든 연구실에는 최소한 한 마리의 귀신이 있었다. 그런 연구실 지박령들은 대학원생을 천천히 미치게 한다.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에 아래의 정보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대학원 초반, 나는 일부 대담한 다른 대학원생과 협업하여 이 귀신을 퇴마 할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다. 전자식 자동 계산기를 이용해보겠다는 친구, 무거운 아령으로 퇴마 하는 친구…….. 우린 정말 별의별 방법을 시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친구들이 귀신에 패배하여 한 줌 재가 된 채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귀신을 피해 치열하게 살아남은 나는 마침내 이 귀신을 퇴마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 위험하다. 까딱 잘못하면 퇴마 과정에서 의식 자체에 잡아먹힐 가능성이 높다. 3년을 같이 지낸 내 대학원 동기는 이 퇴마 의식에 빠져 한 학기를 꼬박 날려버렸다. 혹은 너무 약한 퇴마를 실시하면 유령이 더 흉폭하게 날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적당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쉽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대학원 짬밥 6년은 그런 밸런스마저 찾아낼 수 있게 만든다.
퇴마, 곧 유령을 쫓아내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설이나 추석에 하는 것처럼 근사하게 한 상 차려놓고 쫓아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요즘 귀신들 역시 상당히 현대화되어 있는 터라 굳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 준비할 것은 유리로 된 잔과 맛있는 술이다.
주둥이가 좁고 잔 아래가 부푼 형태의 유리잔이 추천된다. 먼저 유리로 만든 잔을 꺼내어 깨끗이 닦자. 이때 한 톨의 먼지도 용납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방법은 정수기의 뜨거운 물로 유리를 충분히 불려서 닦는 것이다. 열기가 식기 전에 물기를 제거해야 하고 물기 제거 시 일반 화장지가 아닌 천이나 면을 사용하여 먼지가 흡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잔은 다시 실온까지 자연 냉각시킨다.
그리고 맛있는 술을 한 마디 정도 – 역시 이때도 일정하게 기준을 두는 것이 좋다 – 따른다. 맛있는 술의 정의는 개개인마다 다르므로 ‘어떤 술이다’라고 콕 집어 정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 상 도수가 높은 술일 수록 퇴마 효과가 좋았다. 그리고 충분히 한쪽 방향으로 돌려주어(이를 Swirling 이라 한다) 술이 가진 향미를 컵에 모으고, 의자에 앉아 허리를 바로 세우고 복장을 단정하게 한 후 컵을 코 가까이 대어 향을 맡는다. 이 과정이 퇴마의 50%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최대한 집중을 요한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이 향을 최대한 정의하려고 애써야 한다. 퇴마의식이 처음이면 그 향미가 잘 구분 안 갈 수 있지만, 점점 익숙해지다 보면 ‘검은 베리향’이나 ‘열대 과일 느낌’ 같은 것들이 점점 구별 간다.
충분히 향을 즐겼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경건한 마음을 담아 시계 반시계 방향으로 두어 번 더 스월링을 해준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입술에 대고 조금 기울인다. 술이 혀에 닿는 첫 터치와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그 액체의 움직임을 머릿속에서 상상한다. 그리고 맛을 느낀다. 처음 혀에 닿았을 때의 맛과 냄새를 맡았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찾아보는 좋다. 적은 양을 가능하면 느리게 넘긴다. 필요하다면 입술을 다문채로 하악골을 아래로 움직여 입 안에 충분한 공기가 있는 상태로 우물거리는 것 까지는 허용되어 있다. 입을 아주 작게 벌려 바람과 술을 입 안쪽으로 분사하듯 마시는 방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아주 어려운 퇴마 절차일 뿐 만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소개하지 않겠다.
술이 목구멍으로 전부 사라졌다면, 이제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향을 맡아야 한다. 먼저 천천히 가슴 깊숙이 까지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입을 다문 상태로 코로 느리게 내쉰다. 이 사이 술의 향미는 처음과 아주 달라졌을 터인데,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그 차이를 잡아내는 것이 이 퇴마 의식의 포인트다. 그리고 나중 퇴마 의식을 위해서 기억해두자.
이러한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잔에 있는 술을 전부 마셨을 것이다. 퇴마 의식은 술을 따르고, 향을 맡고, 맛을 보고, 피니쉬를 느끼는 이 일련의 4단계의 과정을 총 2번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첫 번째 퇴마 의식이 끝났다면, 두 번째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퇴마 의식으로 고단한 혀와 코, 목구멍을 좀 쉬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이때 제대로 된 수준 높은 퇴마 의식의 경우 탄산수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연구실에서 여의치 않을 경우 향취가 없는 물, 가급적이면 미지근한 물을 반 컵 정도 마신다. 너무 차가운 물은 감각을 무디게 만드므로 추천하지 않는다. 이때도 마치 입안에 남아있는 술을 씻어내는 느낌으로 느리게 마시면 좋다.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가글 하듯 마시면 귀신을 성나게 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
2~3분 정도 휴식을 가지고 다시 두 번째 의식을 실시한다. 방법은 첫 번째와 똑같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 이게 이 퇴마 의식의 핵심인데, 바로 의식 도중에 찾아오는 유령의 속삭임을 듣지 않는 것이다. 이 귀신은 여간 독한 게 아니라서, 퇴마 의식을 그만두라고 하기는커녕 더 하라고, 계속해서 하라고 종용한다. 마음속에서 ‘의식 2번으로는 부족한 거 아냐?’라는 물음이 피어날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이 귀신이 속삭이는 것이다. 이것을 이겨내야 퇴마 의식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
내가 이런 유혹을 떨쳐내기 위해 하는 방법은, 의식이 끝나자마자 뜨거운 물로 잔을 씻는 것이다. 마지막 모금을 넘기고 바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정수기의 뜨거운 물로 잔 안쪽을 헹군다. 이렇게 하면 잔이 식을 때까지 술을 따르지 못하므로, 귀신은 퇴마 효과가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퇴마 의식을 진행하고 난 다음, 그 살짝의 유혹만 이기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다. 논문도 잘 써진다. 참조 문헌 정리도 더 쉬워진다. 실험하는 몸이 가볍다. 뭔가 한 끗 기분이 좋아서인지 새로운 해결책도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피피티 제작도 그렇게 즐거울 수 없다. 필시 귀신을 쫓아서 그런 것이리라. 물론 내일이면 귀신은 다시 찾아오겠지만.
그렇게 새벽이 다가오고, 대학원생의 하루가 진다…….
라는 컨셉으로 술을 마시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