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The Man Who Was Thursday: A Nightmare
G.K. Chesterton
펭귄클래식/김성중
1장
사프론 파크의 두 시인
런던 서쪽에 위치한 사프론 파크 지역 주변은 해 질 녘의 구름처럼 붉은색을 띠고 줄멍줄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곳의 집들은 모두 밝은 색 벽돌로 지어졌다. 집들이 하늘과 맞닿아 그리는 선은 환상적이었고,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도 기이했다. 그곳은 추측하기를 좋아하는 한 건축가가 살짝 예술적 정취를 가미하여 세웠는데, 그는 그 건축양식이 엘리자베스 여왕식이라 하고, 또 어떤 때는 앤 여왕식이라고도 하여 마치 두 여왕의 통치 시기가 같은 양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이라 할 만한 것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이곳이 예술의 마을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어느 정도 정당한 평이었다. 지성의 중심지라는 주장에는 수긍할 수 없어도 쾌적한 곳잉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기이하게 붉은 색을 띤 집들을 처음 보는 사람은 그런 집에 사는 사람은 또 얼마나 기이하게 생겼을까 생각했다. 꿈이라기보다 꿈이라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곳은 쾌적할 뿐만 아니라 완벽한 곳이 되었다. 그곳 사람들이 ‘예술가들’은 아니더라도 그 지역 전체가 예술적이기는 했다. 적갈색 긴 머리에아주 오만한 인상을 주는 어느 젊은이는 사실 시인은 아니지만 의심의 여지없는 한 편의 시였다. 제멋대로 난 흰 수염, 투박한 흰 모자가 눈길을 끄는 노신사는 허풍스럽지만 덕망이 있는 사람인데, 진짜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철학 얘기를 꺼내게 하는 인물이었다. 달걀 모양의 대머리와 새 같은 목을 드러내 보이는, 과학을 좋아하는 한 신사는 자신이 과학적인 인물이라고 허세를 부릴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는 전혀 발견해 내지 못했지만 자신보다 더 독특한 생물학적 존재를 발견할 재간은 없었으리라. 이런 묘사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그곳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곳은 예술가들의 작업장이라기보다는 데되긴 하지만 완성된 예술 작품으로 생각하는 편이 타당했다. 이곳의 사교적인 분위기에 발을 들인 사람은 마치 희극 작품 속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땅거미가 질 무렵, 저녁놀을 배경으로 독특한 지붕들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그 마을 전체가 떠다니는 구름처럼 이 세상에서 분리된 것처럼 보일 때, 이 흥미로운 비현실성은 한층 더 뚜렷하게 그곳을 뒤덮었다. 이따금 작은 정원들에 불이 환히 밝혀지고, 작은 나무에 사납고 기괴한 형상의 과일처럼 매달린 커다란 초롱불들을 밝히는 행사가 열리는 밤에는 더욱 그러했다. 적갈색 머리의 시인이 대화를 주도한 이날 저녁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러했다는 것이 아직도 마을 사람들의 뇌리엔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물론 이날만 그 시인이 대화를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저녁에 그의 작은 정원을 지나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사람들에게, 그중에서도 유난히 여자들에게 고압적인 태도와 설교 조의 높은 목소리로 훈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여자들의 태도에는 좀 모순이 있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막연하게나마 여성의 권리를 생각하고 남성우월주의에반 감을 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신여성들은 보통 여자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만한 그 남자의 이야기에 늘 지나친 칭찬을 늘어놓았다. 적갈색 머리의 시인 루치안 그레고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냥 웃어 넘길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얘기였다. 그는 예술의 무법성과 무법성의 예술이라는 진부한 말에도 순간적으로나마 흥미를 끌게 하는 신선함을 풍겼다. 시선을 끄는 기이한 외모도 한몫했는데, 그는 그렇게 꾸미려고 신경을 썼다. 여자들처럼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라파엘전파 그림에 나오는 처녀처럼 머리를 굵게 말았다. 성자 같은 타원형 머리 아래 얼굴은 뜻밖에도 거칠고 넓적한 형태였고, 턱은 하층민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조합은 신경이 예민한 그곳 사람들에게 흥미와 더불어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는 천사와 원숭이가 결합된, 걸어 다니는 신성모독처럼 보였다.
이날 저녁은 무엇보다 기이한 노을 때문에 그곳 사람들에게 특별히 기억되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늘 전체가 더없이 선명하고도 손으로도 만져질 것만 같은 깃털로 덮인 것처럼 보였다. 그 깃털이 얼굴에 스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늘 대부분은 잿빛이었지만 보랏빛과 연보랏빛, 그리고 이상 야릇한 분홍색 혹은 연녹색이 기괴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서쪽 하늘 전체가 빛나고 강렬해서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붉게 물든 깃털 끝 부분은 보여주기엔 너무 훌륭한 것인 양 태양을 가렸다. 그 하늘은 대단한 비밀스러움을 발산하려고 지상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았다. 하늘 자체가 하나의 비밀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 지역의 독특한 정신인 작은 것의 미학을 표현했다. 그 하늘의 끝 부분은 그렇게나 작아 보였다.
그 압도적인 하늘 때문에 그날 저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지만, 어떤 이들은 사프론 파크에 두 번째 시인이 처음 나타난 날로서 그날을 기억했다. 오랫동안 그 적갈색 머리의 혁명주의자가 독보적인 존재였건만, 이날 저녁 그는 자신의 그 영광스러운 지위를 잃고 말았다. 가브리엘 사임이라는 새로운 시인은 옅은 금발에 턱수염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아주 온순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사실은 겉모습만ㅋ큼 온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오랫동안 인정받았던 시인 그레고리와 시의 본질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는 스스로를 법과 질서의 시인이자 존경받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사프론 파크 사람들은 그가 불가사의한 하늘에서 한순간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했다.
무정부주의 시인 그레고리 씨는 실제로 그 두 사건을 연관 지었다. 그는 갑자기 서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
“그런 끔찍한 색으로 물든 구름에 덮인 저녁은 과연 이 세상에 존경받을만한 시인이 온다는 징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법의 시인이라 자칭하는데, 그 말에는 분명히 모순이 있소. 당신이 이 정원에 나타난 오늘 저녁에 유성이 떨어지거나 지진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뿐이오.”
온순해 보이는 푸른 눈과 뾰족한 모양의 옅은 턱수염을 한 사임은 유순하면서도 엄숙하게 이렇듯 몰아치는 말투를 견디어냈다. 이 자리에는 그레고리의 누이동생 로자먼드도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오빠처럼 적갈색이지만 인상은 훨씬 온화했고, 그 집안의 현자에게 늘 그랬듯이 찬사와 질책이 섞인웃음을 지었다.
그레고리는 웅변조로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예술가란 무정부주의자와 같소. 그래서‘무정부주의자는 예술가이다.’라고 바꿔 말해도 무방할 것이오. 폭탄을 던지는 사람은 예술가라고 할 수 있소.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 위대한 순간을 중요시하기 때문이오. 특색 없는 경찰관의 평범한 모습들보다는 치솟아 폭발하는 불꽃, 완벽한 폭발 소리가 얼마나 더 가치 있는가를 예술가는 알고 있소. 예술가는 모든 정부를 무시하고, 모든 관습을 파기하며, 시인은 오직 무질서에서만 기쁨을 느끼오. 그렇지 않다면, 지하철이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것일 거요.”
“지하철이 가장 시적이라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사임이 말했다.
누군가 앞뒤 안 맞는 소리를 하면 아주 이성적으로 변하는 그레고리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철도에서 일하는 사무원들이나 인부들이 왜 그렇게 침울하고 지쳐 보이는지 아시오? 그건 바로 차표에 쓰인 목적지순으로 열차가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슬론스퀘어의 다음 역은 변함없이, 항상 빅토리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이오. 만일 다음 역이베이 커가(街)라면 그들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에덴동산을 되찾은 것처럼 환희에 넘칠 것이오.”
“시적이지 않은 건 바로 당신입니다. 그 사무원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당신의 시만큼이나 산문적일 수 있겠지요. 드물고 흔치 않은 일은 과녁을 맞히는 것이고, 지루하고 분명한 일은 과녁을 비켜 가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쏜 화살이 멀리 있는 새를 맞힐 때 서사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멋대로 가는 열차가 멀리 떨어진 역을 찾아가는 것은 서사시적이지 않습니까? 혼란은 따분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혼란 상태에서 열차는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까요. 베이커가나 바그다도에도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은 마술사라고 할 수 있죠. 사람이 ‘빅토리아, 아 빅토라이예요.’라고 말할 때가 바로 마술의 순간입니다. 하찮은 시나 산문을 읽으세요. 난자부심으로 눈물 흘리며 기차 시간표를 익겠습니다. 인간의 좌절을 기리는 바이런을 읽으세요. 난 인간의 승리를 기리는 브래드쇼를 읽겠습니다. 난 브래드쇼를 읽겠단 말입니다.”
“어디로 떠나시려고?” 그레고리는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사임은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열차가 역에 들어올 때마다 전 적의 포위를 뚫고 들어온다고 느낍니다. 인간이 혼란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느낍니다. 당신은 슬론스퀘어 역을 떠나면 다음엔 반드시 빅토리아 역에 도착한다고 조롱했지만 저는 다른 가능성이 수천 가지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빅토리아 역에 도착할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승무원 이외 치는 ‘빅토리아!’라는 소리를 들을 때, 그 말은 내게 대단한 의미를 지니지요. 그것은 승리를 알리는 전령의 외침과 같아요. 그건 말 그대로 ‘승리’를 의미합니다. 아담의 승리지요.”
그레고리는 덥수룩한 적갈색 머리를 저으며 희미하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시인들은 항상 질문을 던지지요. ‘우리가 그렇게 도착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빅토리아는 무엇인가?’ 당신은 빅토리아가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우리에게 새로운 예루살렘은 빅토리아에 지나지 않소. 바로 그거요. 시인은 천국의 거리에 있어도 불만에 차 있을 거요. 시인은 항상 반항하니까.”
사임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또 그러시는군요. 반항적인 것이 어떤 점에서 시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멀미가 나는 것도 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멀미가 나는 것은 반항이라고 말입니다. 멀미와 반항이 어떤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이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어째서 시적이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말 그대로 반항이고, 구토일 뿐입니다.”
로자먼드 양은 듣기 거북한 단어에 순간 얼굴을 찡그렸지만 사임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알아채지 못했다.
“시적이란 것은 제대로 작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신성하고도 말없이 잘 작용하는 우리의 소화 기능이야말로 모든 시적인 것의 토대입니다. 그렇습니다. 꽃보다 별보다 시적인 것,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것은 속이 메스껍지 않은 것입니다.”
그레고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든 그 예는 좀……..”
사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예법은 신경 쓰지 않기로 한 줄 알았습니다.”
처음으로 그레고리의 이마에 붉은 반점이 생겼다.
“내가 지금 당장 혁명이라도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가 말했다.
사임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싱긋 웃었다.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진지한 무정부주의자라면 분명 실행에 옮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그레고리가 황소같이 큰 눈을 성난 사자처럼 세차게 껌뻑껌뻑거리는 바람에, 그는 마치 적갈색 갈기를 세운 사자처럼 보였다.
그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허튼소리로 무정부주의자라고 말했다는 거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무정부주의자라고 한 말이 농담인 줄 아느냐 말이오!”
주먹을 불끈 쥐며 그레고리가 말했다.
“친애하는 그레고리 씨!” 사임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는 아직까지 로자먼드 양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놀란 한편 야릇한 기쁨을 느꼈다.
“사임 씨, 오빠나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요? 지금 당신이 말한 것이 진심인가요?”
사임은 빙긋 웃어 보였다.
“당신이 한 말은 진심인가요?” 그가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사임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친애하는 로자먼드 양, 진정성과 비진정성에는 여러 종류가 있죠. 소금은 건네받았을 때 ‘고마워요.’라고 하는 말은 진정입니까? 아닙니다. ‘지구는 둥글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 진정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은 진실이지만, 진정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당신 오빠 같은 사람도 때로는 진심이 담긴 무언가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반만 진심일 수 있고, 4분의 1이나, 10분의 1만 진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의도하는 것 이상으로 말하죠. 진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능력으로 말입니다.”
그녀의 균형 잡힌 눈썹 아래 두 눈이 그를 향했다. 그녀는 진지하고도 관용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극히 평범한 여인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막연한 책임감이 그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이 세상만큼이나 오래된 모성의 시선이었다.
“그러면 오빠는 정말 무정부주의자인가요?”
“제가 말한 의미에서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제말이 궤변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만.”
눈썹을 한데 모으며 그녀는 툭 내뱉었다.
“오빠는 폭탄 같은 건 던지지 않을 거예요.”
이 말에 그는 날씬하고 말쑥한 차림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파안대소를 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그런 일은 익명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니까요.”
이 말을 듣고,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빠의 터무니없는 말과 그가 무사할 것임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사임은 그녀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계속 쏟아냈다.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겉모습과 차림새에 신경을 쓰기는 하지만, 근본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거의 겸손하다.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를 너무 주의 깊게 관찰하기 마련이다. 사임은 옷차림새를 지나치게 중요시했다. 그리고 말끔함과 품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에게서는 항상 라일락 향기가풍 겼다. 멀리서 희미하게 손풍금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자신의 영웅적인 말투가 지하 세계나 천상의 세계에서 들리는 연약한 곡조에 실려 흐르는 것처럼 느꼈다.
사임은 로자먼드 양의 적갈색 머리와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보며 몇 분 동안 말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어섰다, 그런데 정원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사람들이 모두 오래전에 돌아갔기에 자신도 허둥지둥 변명을 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이후에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샴페인 맛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이상한 사건들에 이 여인은 연루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그녀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에 발생하는 모든 기이한 모험에서 그녀는 음악에서의 모티프처럼 설명하기 힘든 방법으로 되살아났고, 그녀의 기묘한 머리 빛깔은 어둡고 잘못 짜인 밤의 태피스트리 사이를 붉은 실처럼 내달렸다. 이후에 일어난 사건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꿈이었을 수도 있다.
사임이 그곳을 나왔을 때, 별빛이 비추는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순간 사임은 그 고요함이 죽은 고요함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고요함임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깨달았다. 문밖에 있는 가로등은 그 뒤편 담에 드리운 나뭇잎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가로등 기둥 옆에는 그 기둥만큼이나 미동도 없이 꼿꼿하게 서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검정 중절모에 정장용 검정 긴 코트 차림이었고, 불쑥 나타난 그림자 진 얼굴도 검게 보였다. 삐져나와 빛에 반사된 적갈색 머리와 거침없는 몸짓으로 그가 시인 그레고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흡사 상대방을 죽이려고 손에 칼을 들고 복면을 한 자객 같았다.
그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인사를 했고, 사임은 다소 정중하게 인사를 받았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약간 의아해하면서 사임이 대답했다.
그레고리는 지팡이로 가로등 기둥과 나무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런저런 것들에 관한 이야기라오. 질서와 무질서 말이오.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늘고 보기 흉하고 불모의 쇠로 된 가로등 같은 질서와, 풍요롭고 살아 있고 스스로 재생산해 내고 녹색과 금빛으로 빛나는 무질서 말이오.”
사임은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또 그 말씀이시군요. 가로등 불빛으로 나무를 보기만 하시는데, 언제가 돼야 나무의 빛으로 가로등을 볼 수 있으시겠습니까. 혹은 우리의 사소한 논쟁을 다시 시작하려고 그 어두운 곳에 서계신 것은 아니겠죠?”
“아니오!” 그레고리는 골목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의 논쟁을 다시 시작하려는 게 아니라 완전히 끝내려고 여기 서 있었던 거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사임은상대방이 진지한 대화를 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하여 귀를 기울였다. 그레고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잔잔한 목소리로 마라기 시작했다.
“사임 씨, 오늘 저녁 당신은 정말 믿기지 않는 행동을 했소. 여자가 낳은 어떤 사람도 내게 하지 못한 행위를 했단 말이오.”
“그랬을 리가요!”
과거를 돌이키며 그레고리는 말을 이었다.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또 하나 있었소.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사우스엔드에서 1 페니를 받고 배를 몰던 선장이었지. 당신은 내 기분을 상하게 했소.”
“죄송합니다.” 사임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내 격분과 당신이 준 모욕은 사과 한마디로 씻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오. 결투로도 해결이 안 될 거요. 당신을 찔러 죽인다고 해도 해소되지 않을 것이오. 그 모욕감을 해소할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난 그걸 택하겠소. 내 생명과 명예를 걸고 당신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소.”
그레고리는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한 말 중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당신은 내가 진지한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소.”
“진지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은 자기 말의 가치를 인정하고, 역설이 사람들로 하여금 간과한 진실을 깨닫게 한다는 것을 믿기에, 그 점에서는 당신의 진지함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다른 점에서는 진심이 아니라는 말이오? 가끔은 진실을 말하는 허튼 사람이란 말이오? 더 깊거나 치명적인 사안에서는 진지하지 않다는 말이오?”
사임은 지팡이로 길가의 돌을 세게 치며 말했다.
“진지함이라고요? 세상에! 이 거리에 진지함이 있습니까? 이 잘난 초롱불에 진지함이 있습니까? 세상 모든 것에 진지함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든 와서 허튼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좀 바른 소리를 하기도 하죠. 하지만 인생에서 종교나 술보다 더 진지한 것을 간직하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는 하찮게 생각합니다.”
엄숙한 표정으로 그레고리가 말했다.
“잘됐소. 술이나 정교보다 더 진지한 것을 보게 될 테니.”
사임은 보통 때처럼 온화한 태도로 기다리며 서 있고, 마침내 그레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종교에 대해서 말했는데, 당신도 종교가 있소?”
사임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 우리 모두 가톨릭 신자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종교가 숭상하는 신에게 맹세하든, 성인에게 맹세하 든, 내가 지금 당신에게 말하려는 것을 경찰에게는 물론이고, 어떤 아담의 후손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소? 만일 당신이 이 지독한 맹세를 하겠다면, 만일 해서는 안될 맹세와 꿈에도 생각지 못할 비밀로 당신의 영혼에 짐을 지우겠다면, 난 그 보답을 하겠소.”
“무슨 보답을 하겠다는 말이죠?”
“아주 흥미로운 저녁을 선사하겠소.”
사임은 모자를 휙 벗으며 말했다.
“그런 제안은 너무 우스꽝스러워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시인은 항상 무정부주의자라고 당신이 말했지만 난 동의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난 시인이 항상 공정하게 행동하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장 기독교인으로서 맹세하고, 선한 동료이자 같은 예술가로서 그 무엇이든 경찰에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죠. 그런데 도대체 그게 뭡니까?”
그레고리는 질 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마차를 불러야겠소.”
그가 길게 두 번 휘파람을 불자, 마차가 덜커덕거리며 다가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마차에 올랐다. 글고리는 강의 치스윅 둑에 있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주점 위치를 알려 주었다. 마차는 미끄러지듯 신속히 출발했고, 두 몽상가는 환상의 마을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