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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Nov 08. 2015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펭귄클래식/김진석 옮김

 

작가 서문

예술가는 아름다운 사물의 창조자다.

예술을 드러내고 예술가를 숨기는 것이 예술의 목표다.

비평가란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인상을 다른 방식이나 새로운 소재로 바꾸어놓는 사람이다.

비평의 최고이자 최악의 형태는 자서전이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추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아무런 매력 없이 타락한 인물이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이 있다. 이들에게는희망이 있다.

아름다운 사물을 오직 ‘아름다움’의의미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선택된 사람들이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 썼든지, 잘못 썼든지 둘 중 하나다. 단지 그뿐이다.

사실주의에 대한 19세기의 혐오는 캘리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보며 분통을 터뜨린 것과 같다.

낭만주의에 대한 19세기의 혐의는 캘리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보지 못해 분통을 터뜨린 것과 같다.

인간의 도덕적 삶은 예술가가 다루는 주제의 일부를 형성하지만, 예술의 도덕성은 불완전한 매개를 완벽하게 사용하는 것에 존재한다.

어떠한 예술가도 증명을 바라지는 않는다. 진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에대해서조차도.

어떠한 예술가도 윤리적인 공감을 지니지는 않는다. 예술가의 윤리적인공감이란 용납할 수 없는 매너리즘의 양식인 것이다.

어떠한 예술가도 병적인 존재는 아니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표현할수 있다.

사상과 언어는 예술가에게 예술의 도구다. 

악덕과 미덕은 예술가에게 예술의 소재다.

모둔 예술의 전형은 형식적인 면에서 음악가의 예술을 따르며, 정서적인면에서 배우의 연기를 따른다.

모든 예술은 표피적이면서 상징적이다.

표피 아래를 탐구하는 사람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상징을 읽어내는 사람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예술이 진정으로 반영하여 보여 주는 것은 관객이지 인생이 아니다.

한 예술 작품에 대한 경해의 다양함은 작품이 새롭고 복잡하며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비평가가 예술가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예술가는 자신과 일치한다.

유익한 물건을 만든 사람이 그것을 스스로 칭찬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다. 쓸모 없는 물건을 만든 경우 남들의 열렬한 칭찬 이 있어야만 유일하게 용서가 가능하다.

모든 예술은 무익하다.

 

1장

화실은 풍성한 장미향이 가득했고, 가벼운 여름 바람이 정원의 나무들사이를 휘젓자 라일락의 짙은 향기, 혹은 분홍 꽃이 핀 가시나무의 더욱 미묘한 향내가 열어놓은 문을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페르시아산 안장주머니처럼 생긴 긴 소파 한구석에 누워 평소처럼 담배를 무수히 피우던 헨리 워튼 경도, 꿀처럼 달콤하고 꿀처럼 샛노랗게 만발한 금련화를 얼핏 볼 수 있었다. 금련화가지는 활활 타오르는 듯한 아름다움의 무게를 도저히 지탱하지 못하고 떨리는 것처럼 보였고, 이따금씩커다란 창가에 길게 늘어진 비단 커튼을 휙 스치며 날아가는 새들의 환상적인 그림자가 일종의 찰나적인 일본풍의 느낌을 풍겼다. 헨리 경은, 필연적으로 고정된 예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날렵하면서도 동적인 느낌을 추구하는 창백하고 마른 도쿄의 화가들을 떠올렸다.웅웅거리는 벌들이 아직 채 배어지지 않은 잔디 사이를 헤치며, 혹은 마구 뻗어나간 인동덩굴의먼지 낀 금빛 뿔 주의에서, 단조롭고 고집스럽게 빙빙 돌면서 고요한 주변을 더욱 적막하게 만드는 것같았다. 런던의 희미한 소음은 멀리서 울리는 오르간의 가장 낮은 음처럼 들렸다.

방의 중앙에 놓인 이젤은 독특한 인간적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젊은 남자의 전신 초상화를 받치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앞쪽에 그림을 그린 화가 바질 홀워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몇 년 전 갑작스레 사라져서 당시 대중의 동요를 자아냈고 수많은 이상한 억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화가가 그토록 솜씨 좋게 재현해 놓은 자신의 우아하고 훌륭한 작품을 바라볼 때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일었고그것은 좀처럼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그는 벌떡 일어나 눈을 감았고, 스스로 깨어나기조차 두려워하는 어떤 기묘한 꿈을 자신의 머릿속에 간직하려는 듯 손가락으로 눈썹을 지그시 눌렀다.

“바질, 그건 자네의 가장훌륭한 작품일세. 자네가 그린 것 중에 최고야.” 헨리 경이나른하게 말했다. “내년에는 확실히 그 작품을 그로스브너에 출품해야 해. 아카데미는 너무 크고 너무 대중적이지. 난 아카데미에 갈 때마다그렇더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림을 볼 수 없을 때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어. 아니면 그림이 너무 많아 사람을 볼 수 없을 때는 더욱 나쁘지. 그로스브너가정말로 유일한 곳일세.”

“난 이 작품을 어디에도 출품할 것 같지 않아.” 화가는 옥스퍼드에 다니던 시절 그의 친구들에게서 비웃음을 샀던 자신만의 특이한 방식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대답했다. “아니. 절대로 난 어디에도 내놓지 않을 거야.”

헨리 경은 눈썹을 치켜 떴으며, 진한 아편 성분을 띤 담배에서 근사한형태로 헝클어지며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푸른 연기를 꿰뚫고서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디에도출품하지 않는다니? 여보게, 이 친구야, 왜 그러나? 무슨 이유라도 있나?화가들이란 얼마나 기이한 족속이란 말인가! 자네들은 명성을 얻으려고 무엇이든 하지. 그러면서 명성을 얻고 나면 그걸 즉시 내팽개친단 말이야. 그건 어리석은짓일세. 왜냐하면 세상에서 남의 입에 오르내르는 것보다 나쁜 건 단 하나뿐이니 말일세. 그건 남의 입에 전혀 오르내리지 않는 거라네. 이런 초상화는 영국의어떤 젊은 화가들보다 자네를 훨씬 앞서게 할걸세. 나인 든 이들도 몹시 질투하겠지. 만약 그들이 조금의 감수상이라도 지녔다면 말일세.”

“자네가 나를 놀릴 줄 알았어.” 그가대답했다. “그렇지만 난 정말 이 그림을 전시할 수가 없어. 이속에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집어넣었거든.”

헨리 경은 소파에서 몸을 쭉 뻗으며 웃었다.

“자신을 너무 많이 집어넣다니! 바질, 맹세컨대 난 자네가 그렇게 싱거운 줄은 몰랐네. 더구나 나로선 자네와그 그심 사이에 유사점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니 말일세. 자네의 거칠고 강한 얼굴, 칠흑같이 검은 머리와 이 미청년의 사이에 말일세. 그는 마치 상아와장미 잎사귀에서 탄생한 것 처럼 보이는 군. 여보게 바질, 가는나르키소스일세. 그리고 자넨, 음 물론 자넨 지적인 표정을지녔지. 그런 데 아름다움이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지적인표현이 시작되는 곳에서 사라지고 만다네. 지성이란 본래 과장된 표현 양식이어서 어떤 얼굴이든 그 조화를일그러뜨리니까. 일단 자리에 앉아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사람은 오직 코나 이마, 혹은 다른 끔찍한 것으로만 남게 되거든. 학식을갖춘 직업을 갖고 성공한 인물들을 살펴보게나. 그들이 얼마나 흉측하던가! 물론 교회의 경우는 예외지만. 그래도 교회에 종사하는 이들은 생각을하지 않지. 나이가 여든인 주교는 그가 열여덟 살 청년일 때 들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데, 그러니까 당연히 그는 항상 기쁨이 넘치지. 자네의 수수께끼 같은젊은 친구는 그 이름을 자네가 말해 준 적은 없지만, 그 모습은 정말로 나를 매료시키는군. 생각도 못한 일이야. 난 그 점을 대단히 확실하게 느낀다네. 아마도 그는 별반 머리는 없는 아름다운 인물일 걸세. 꽃이 없는겨울에 이곳에 와서 있지도 않은 꽃을 보려고 하든지, 여름에 이곳에 와서 항상 우리의 지성을 오싹하게한다든지. 바질, 우쭐대지 말게. 자넨 그를 조금도 닮지 않았으니까.”

“자넨 나를 이해하지 못해, 해리.” 화가가 대답했다. “물론 나는 그를 닮지 않았어. 그 사실은 나도 확실하게 알아. 내가 그와 닮아 보인다면 나로선정말 유감일 거야. 이해가 안 되겠지? 난 자네에게 진실을말하는 거리네.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 남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모든 존재는 불운을 겪게 되지. 지난 역사에서 왕들이 비틀대며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그런 불운 말이지. 사람들은 자신의 무리들과 다르지 않은 게 더 낫다네.이 세상에서미천한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이 그런 면에서 가장 유능하지. 그들은 편안히 앉아 하품을 하며 연극을 지켜보니까. 그들이 설사 승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적어도 패배란 것에대해선 최소한의 지식을 지녔을 거야. 그들은 우리 모두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고뇌하지 않고 무관심한 데다 불안에 떨지도 않아. 그들은 남들을파멸시키지도 않고, 남의 손에 파멸되지도 않아. 해리, 자네의 지위와 부유함이라든지, 나의 명석한 두뇌, (혹은 나의 예술, 그게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든지 간에)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의 잘생긴 외모, 우린 모두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이것들 때문에 고통 받고 있어. 끔찍한 고통이지.”

“도리언 그레이라고? 그의이름인가 보군?” 헨리 경이 화실을 가로질러 비질 홀워드를 향해 걸으며 물었다.

“맞아. 그의 이름이라네. 자네에게 굳이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왜 말하지 않으려 했나?”

“오, 나로선 설명할 수가없어. 난 어떤 사람을 무한히 좋아하게 되면 그들의 이름을 남들에게 절대 밝히지 않아. 그건 마치 그들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 같거든. 난 내밀한 것을점차 애호하게 되었지. 현대의 삶이 신비하거나 경탄할 만한 것이 되려면 그럴 필요가 있는 것 같거든. 가장 흔한 것은 그것을 감출 경우에만 환희를 줄 수 있다네. 내가만일 이 도시를 떠나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을 거라네. 혹시라도 그 말을입 밖에 냈다간 나의 기쁨이 모두 사라져버릴 거야. 감히 말하지만 이건 어리석은 습성인데, 어쨌거나 개인의 삶에 크나큰 낭만을 주는 것 같단 말이지. 아마자넨 나를 끔찍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럴 리가 있나.: 헨리경이 대답했다. “여보게, 바질, 난 절대 그러지 않아. 자넨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군. 결혼의 매력 중 하나는 기만적인 삶이 양쪽 모두에게 필수적이게끔 한다는 점일세. 난 내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 절대 모른다네. 아내는 내가 뭘 하는지결코 알지 못하지. 우리가 만나면 (우린 이따금 만나지,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공작의 집에 들를 때) 우린 가장 심각한얼굴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네. 사실상 그 점에선 아내가 나보다 훨씬 능숙하지만. 그녀는 날짜를 헷갈리지도 않으니까. 난 늘 날짜를 틀리는데, 아내는 그걸 알고도 별로 트집을 잡지 않지. 가끔은 아내가 트집을잡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녀는 단지 비웃기만 하거든.”

“해리, 난 자네가 자네결혼생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싫어.” 바질 홀워드는 정원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말했다. “난 자네가 정말 좋은 남편이라 믿는다네. 자네가자신의 미덕을 철저히 부끄러워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자넨 특이한 친구야. 도덕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적이 없지만, 그릇된 일을 저지르는 적도없으니까. 자네의 냉소는 그저 허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자연스러운 척하는 것이야말로 허식일세. 그건 내가 아는 가장 짜증나는 허식이라네.” 헨리 경은 웃으며 큰소리로말했다. 두 청년은 정원에 나가서 함께 거닐었고, 키가 큰월계수 관목 아래의 그늘에 놓여 있는 길쭉한 대나무 의자에 앉았다. 햇볕이 정갈한 나무 잎사귀에 비쳤다. 잔디밭에서 흰 데이지 꽃이 떨고 있었다.

잠시 뒤 헨리 경은 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바질, 유감이지만 난 가봐야 하네.” 그가 소곤대듯이 말했다. “그러니 내가 가기 전에 조금 전에 했던 질문에 대해 자네의 대답을 들려주게나.”

“무슨 질문 말인가?” 화가는계속 땅을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도 잘 알 텐데.”

“모르겠어, 해리.”

“음, 그렇다면 말해 주지. 난 어째서 자네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를 전시회에 출품하지 않으려 하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네. 진짜 이유를 말일세.”

“진짜 이유는 말했다네.”

“아냐, 자넨 말하지 않았어. 자넨 그 속에 자신을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고 했지. 그건 유치한대답일세.”

“이것 보게, 해리.” 바질 홀워드는 친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감정을품고 그린 모든 초상화는 말이야, 그 대상의 초상이라기보다 화가 자신의 초상이라네. 대상은 단순히 우발적으로 그곳에 놓인 대상일 뿐이지. 화가가 그림으로드러내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채색된 캔버스에는 화가 자신이 드러난다는 걸세. 내가 그 그림을 출품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내 영혼의 비밀이 그 속에서 드러나는 것 것을 바라지 않아서라네.”

헨리 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기에?” 그가 물었다.

“내가 말해 주지.” 홀워드가말했다. 그런데 곧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무척 기대가 되는군, 바질.” 화가를 쳐다보며 친구가 재촉했다.

“아, 정말로 별로 할말이 없어, 해리.” 화가가 대답했다. “그리고 나로선 자네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야. 아마 자넨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거야.”

헨리 경은 미소를 지었고, 몸을 숙여 잔디밭에서 분홍색 꽃잎이 달린데이지를 꺾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네.” 그는 하얀 솜털이 난 작고 노란 꽃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뭔가를 믿는 것에 관해서라면, 난 아무리 의심스러운 이야기라도 뭐든 믿을 수 있다네.”

나무에 핀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으며, 별무리처럼 빽빽이 들어선 수많은라일락 꽃잎들이 나른한 공기 중에 이리저리 움직였다. 메뚜기 한 마리가 벽 옆에서 찌르르 소리를 내기시작했고, 파란 실처럼 생긴 가늘고 기다란 잠자리 한 마리가 갈색의 희뿌연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헨리 경은 이제 바질 홀워드의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고, 그가 무슨 말을 털어놓을지 자못 궁금해졌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실은 이렇다네.”화가가 약간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두 달 전에 브랜든 부인의 집을 불쑥 찾아갔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같은 가난 한 예술가들은 가끔씩이라도 사교계에 모습을 보여야 하거든. 우리가 야만인이 아니라는 점을 대중에게 각성시키기 위해서 말이야. 자네도한번 말한 적이 있지만, 연미복을 입고 흰 타이를 매면 누구든지 심지어 주식 중매인조차도 교양 있다는평을 들을 수 있지. 글쎄, 한 10분쯤 방 안에 머무는 동안 심하게 몸치장을 한 노부인들, 또 지루한아카데미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걸 문득 깨달았다네. 난 몸을 반쯤 돌렸고, 그때 도리언 그레이를 처음 보았지. 우리가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난 현기증을 느꼈어. 이상한 공포감이덮쳐 왔지. 난 내가 용납할 경우, 단지 그의 존재만으로도내 모든 본성과 내 온전한 영혼과 나의 예술 자체마저도 모두 빨아들여 버릴 것 같은 매력적인 인물과 마주하고 있음을 알았지. 난 평생 외부의 영향 같은 것을 내키지 않아 했지. 자네도 알 거야, 해리, 내가 천성적으로 얼마나 독립적인지 말이야. 난 언제나 나 자신의 주인이었고, 적어도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기전까지는 늘 그랬어. 그런데 그 순간은…… , 아무튼 자네에게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나 자신이 일생에서 극도의 위험한 순간에 처했다고 뭔가 속삭이는 것같았으니까. 난 운명이 나를 위해 최상의 기쁨과 최상을 슬픔을 예비해 놓은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네. 난 겁이 났어. 그래서 방에서 나가기로 마음먹었지. 나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건 양심이 아니었어. 그건 일종의 소심함때문이지. 그곳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한 나 자신을 칭찬해 줄 수는 없었으니까.”

“양심과 소심함은 사실상 같은 것이라네, 바질. 양심은 고집스러움을 일컫는 말이지. 그게 전부라네.”

“해리, 난 그 말을 믿지않아. 자네 역시 그 말을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무튼그렇게 행동한 내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어쩌면 그건 자부심일 수도 있지, 왜냐하면 내 자신에 대해 난 늘 자부심을 품어왔으니까.) 난 문앞에 겨우 다다랐지. 물론 그곳에서 브랜든 부인과 마주쳤지만 말이야.  ‘홀워드 씨, 이렇게 일찍가시면 안 돼요.’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이 말하더군. 트깅하게높고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를 알잖나?”

“그렇지. 그녀는 모든면에서 공작을 닮았지. 예쁘지 않다는 점만 빼고 말일세.” 헨리경은 길고 예민한 손가락으로 데이지 꽃을 뜯어내며 말했다.

“난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네.그녀는 나를 왕족들에게 데려갔고, 훈장을 단 사람들과 커다란 머리장식과 앵무새 코를 가진노부인들에게로 안내했다네. 그녀는 나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로 소개했어. 그전까진 그녀와 만난 적은 단 한 번인데도 그녀는 나를 유명인사로 기억했었나 봐. 아마도 그 당시에 내 그림 몇 점이 꽤 성공을 거두었는데, 적어도몇몇 신문에서 그 작품들을 19세기의 불멸의 표준이라는 식으로 떠들어댔던 것 같아. 그리고 어느새 나는 그 존재만으로도 내 마음을 흔들어놓은 청년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알았다네. 우린 서로 눈이 마주쳤어. 경솔한 짓이었지만 나로선 브랜든 부인에게그를 소개해 달라고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네. 어떻게 보면 그렇게 경솔한 행동은 아니었을 거야. 단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우리는 소개를 받지 않았더라도 서로이야기를 나누었을 테니까. 난 그 점을 확신한다네. 도리언역시 나중에 그렇게 말하더군 그도 우리가 서로 만날 운명이라는 걸 느꼈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브랜든 부인은 그 훌륭한 청년에 대해 뭐라고 소개하던가?” 친구가 물었다. “ 내가 알기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손님들을 재빠르게요약하길 좋아하지. 그녀가 한번은 온갖 훈장과 기장을 몸에 걸친 호전적이고 얼굴이 붉은 노신사에게 나를데려간 적이 있었다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끔찍하게 속삭였단 말이지.방 안의 모든 사람에게 다 들리게, 놀랄 만큼 가장 구체적인 점들까지 말이야. 난 그냥 달아나 버렸어. 난 다른 사람들에 관해 나 스스로 알아내는게 좋거든. 그렇지만 브랜든 부인은 정확하게는 자기 물품을 취급하는 경매꾼처럼 자기 손님들을 대우하지. 그녀는 사람들에 대해 전혀 동떨어진 설명을 하든지, 혹은 사람들이알고 싶어 하는 것만을 빼놓고 모든 이야기를 다 한다네.”

“불쌍한 브랜든 부인! 해리, 자넨 그녀에게 너무 가혹하군!” 하워드가 내키지 않은 듯 말했다.

“여보게, 그녀는 살롱을열려고 했지만 겨우 레스토랑을 열었지. 내가 어떻게 그녀를 칭찬할 수 있겠나? 아무튼 말해 보게. 도리언 그레이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가?”

“아, 대충 이런 식이었어. ‘매력적인 청년이랍니다. 가난하고 소중했던 그의 어머니와 나는 떨어지려야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답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아무 일도 안 하는지는 내가 깜빡 잊었는데, (그가 깜짝 놀라더군) 아, 그래, 그레이 씨, 피아노연주를 했나요, 아니 바이올린이던가?’라며 묻더군. 우린 둘 다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지. 그리고 즉시 친구가되었다네.”

“우정의 시작이 웃음이었다면 그다지 나쁘지 않군. 그것에 우정의 끝이라면 가장 좋을 테지만.” 헨리 경이 데이지 꽃을또 하나 꺾으며 말했다.

홀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해리, 자넨우정이 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군.” 그가 중얼거렸다. “혹은반목에 대해서도, 물론 그런 일은 드물겠지만. 자넨 모든사람을 좋아하지. 그 말은 곧 자네가 모두에게 무관심하단 걸세.”

“그런 끔찍하게 부당한 소릴!” 헨리경은 모자를 뒤로 젖히며 큰 소리로 말했고,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청록색의 텅 빈 여름 하늘을 가로질러떠가는, 실타래처럼 얽혀 번득이는 흰 비단 같은 작은 구름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자넨 끔찍하게 부당하군. 난 사람들을 넓게 구분한다네. 외모가 훌륭한 이들은 벗으로 선택하지. 성격이 좋은 이들은 지인으로 삼고. 지성이 뛰어난 이들은 적으로삼는다네. 적을 선택할 때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아. 그러니어리석은 자들은 나의 적이 될 수 없다네. 나의 적들은 모두 웬만큼 지성을 갖춘 이들인데, 그래서 그들은 결국 나를 높이 평가하게 되지. 이런 걸 두고 허영이라고해야 할까? 글쎄, 이건 단순한 허영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나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해리. 그렇지만 자네의 범주에 따르면 난 분명 자네의 지인밖에 안 되겠군.”

“이것 보게, 바질, 자네와 나는 그저 아는 사이는 아니지.”

“그렇다고 해도 벗보다야 못하겠지.그럼 형제의 일종으로 봐야겠군?”

“오, 형제라니! 난 형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내 형은 결코 죽을 것 같지 않아. 내 동생은 다른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고.”

“해리!” 홀워드는 인상을찌푸리며 탄성을 질렀다.

“여보게 친구, 난 그다지심각하지 않다네. 그렇지만 나로선 나의 인척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가 없다네. 내 생각에 그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자신과 똑 같은 허물을 지닌 것을 참고 봐주지 못하기 때문에그런 것 같아. 나는 이른바 상류 계층의 부도덕함을 질타하는 영국 서민들의 분노에 심히 동감한다네. 대중은 술주정이라든지, 어리석음이라든지, 부도덕함을 자신만의 특별한 자산으로 여기지. 그래서 우리 같은 귀족가운데 누군가가 스스로 바보짓을 할 경우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로 여긴단 말일세. 가난한 서더크주민은 이혼 법정에 들어서는 것에 대해 대단히 분노하지. 그럼에도 나로선 무산 계급 중에서 올바르게사는 사람이 10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 같거든.”

“난 자네의 말엔 한 마디도 동의할 수가 없어. 해리, 자네 역시 나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확신해.”

헨리 경은 뾰족한 갈색 턱수염을 매만졌으며, 술이 달린 새까만 지팡이로에나멜 가죽 구두의 끝을 톡톡 두드렸다. “바질, 자네는정말 영국인답군! 벌써 두 번이나 그걸 알아채다니. 만약누군가가 진짜 영국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꺼내 놓는다면(그건 언제나 지각 없는 행동이겠지만.) 그는 그 생각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선 전혀 따져보려 하지 않지. 그가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 그건 오직 그 생각을 말한 사람이 스스로 그걸 믿는지의 여부라네. 결론적으로생각의 가치라는 건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진심이 어떤 것 인지와 전혀 상관이 없다네. 사실상 그 사람이더 불성실할수록 그 생각은 순수하게 지적일 가능성이 커지지. 왜냐하면 그 자신의 바람이나 욕구, 편견에 물들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만 내가 자네에게 정치학이나사회학, 물리학을 토론하려는 건 아닐세. 난 원칙보다는 사람을더 좋아하지. 그리고 세상에서 원칙 없는 사람들을 가장 좋아한다네. 어쨌거나도리언 그레이에 관해 이야기를 더 해보게. 그를 얼마나 자주 만나나?”

“매일. 난 그를 매일보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거라네. 그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니까.”

“대단하군! 난 자네가자네의 예술 말고는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그는 이제 내 예술의 전부야.” 화가가진지하게 말했다.

“해리, 난 가끔 세계역사에서 중요한 시기가 단 두 차례 있었다고 생각한다네. 그 첫 번째는 예술의 새로운 수단이 나타났을때고, 두 번째는 역시 예술에서 새로운 개성이 탄생했을 때지. 베니스에서유화가 처음 발명된 것과, 말기 그리스 조각에 안티노오스의 얼굴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리고 내게는 장차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이 그와 같을 걸세. 중요한건 단지 그를 칠하거나 묘사하거나 그리는 게 아니야. 물론 난 그런 모든 일들을 하지만. 그는 내게 모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내가 그를 대상을 했던 작업에대해 불만족스럽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그의 아름다움이 예술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도 아니라네. 예술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이란 없지. 그리고 내가 도리언 그레이를만난 이후 해온 작품은 훌륭하고 내 평생 최고의 작품이 될 거라는 걸 나도 알아. 그렇지만 뭔가 이상한방식으로(자네가 나를 이해할지 궁금하군.) 그의 인격은 내게예술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 전혀 새로운 양식의 스타일을 떠오르게 했다네. 난 사물을 다르게 보게 되었고,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어. 이제 난 예전까지 내게 감춰져 있던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인생을 재창조할 수 있게 되었지. ‘수많은 생각의 날들 동안 꿈꿔온 형태’로 말이지. 누가 이 말을 했었지? 나도 잊었어. 아무튼 도리언 그레이가 내게 끼친 영향은 그렇다네. 단지 눈에 보이는존재인 이 청년, (그는 사실 스무 살이 넘었지만 내게는 여전히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네.) 단지 눈에 보이는 존재로서 그가 말일세. 이런! 자네가 이 모든 것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을지 궁금하군. 그는 자신도의식하지 못하면서 나로 하여금 새로운 줄기의 학파를 가르쳐주었다네. 낭만적인 영혼의 모든 열정을 간직하면서동시에 그리스 시대의 영혼의 완벽함을 갖춘 학파라네. 영혼과 육신의 조화 그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광기로 그 두 가지를 분리해 버렸지. 그래서저속한 사실주의와 공허한 이상주의를 발명해 냈어. 해리! 도리언그레이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자네도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을 거야! 자넨 내가 그림 풍경화를 기억할거야. 애그뉴가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난 그 그림을 내놓지 않았지? 그 작품은 내가 그린 것들 중에 최고에 속해. 내가 왜 그 그림을팔지 않았는지 알겠나? 그 그림을 그릴 당시 도리언 그레이가 내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라네. 그는 내게 어떤 미묘한 영향을 주었어. 그리고 난 평생 처음으로평범한 삼림에서조차 내가 늘 찾아왔고 늘 그리워했던 경이로움을 볼 수 있었다네.”

“바질, 그건 정말 특별한일이군! 나도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봐야겠어.”

홀워드는 의자에서 일어나 정원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그는 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해리, 도리언 그레이는 내게 예술의 동기와도 같다네. 자넨 그에게서 아무것도보지 못할지 몰라. 난 그에게서 모든 걸 본다네. 그가 내작품 속에 결코 존재하지 않듯이 아마 그에게서 그의 이미지를 볼 순 없을 거야. 앞서도 말했지만 그는내게 새로운 방식을 암시하는 존재거든. 나는 어떤 선의 굴곡에서도 그를 발견하고, 어떤 색의 미묘함과 사랑스러움에서조차 그를 찾아낸다네. 그게 전부일세.”

“그렇다면 어째서 그의 초상화를 출품하지 않으려는 건가?” 헨리 경이 물었다.

“왜냐하면, 그럴 의도는아니었지만 난 그 속에 이 모든 유별난 예술적인 맹목적 숭배를 웬만큼 표현하고 말았으니까. 물론 이점에 관해서는 그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 그는 아무것도 모르지. 앞으로도그 점에 관해서는 전혀 모를 거야.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혹시 짐작할지도 모르거든. 그러니까 나로선 그들의 천박하고 호기심 어린 눈 앞에 내 영혼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거라네. 내 심장을 그들의 현미경 아래에 내놓을 순 없으니까. 그 속에는나 자신이 너무나 많이 들어 있다네, 해리. 나의 너무 많은것들이 말이야!”

“시인들이라도 자네만큼 세심하진 않지. 그들은 열정을 출간해 내는 것이 얼마나 득이 되는지 알거든. 오늘날은상처 입은 마음이 잘 팔리는 시대니까.”

“그래서 난 그들을 미워한다네.” 홀워드가외쳤다.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해야 하지. 그러나자신의 삶 자체를 내놓아서는 안 돼.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예술을 마치 자서전의 한 형태인듯 취급하거든. 우린 아름다움의 추상적인 감각을 잃었어. 언젠가난 세상에 그것이 어떤 건지 보여 줄 거야.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를 내놓을수 없는 거라네.”

“난 자네가 틀렸다고 생각하네, 바질. 그렇지만 자네와 말싸움을 벌일 생각은 없군. 논쟁은 지성을 잃게만들지. 자, 말해보게. 도리언그레이도 자넬 그러게 좋아하나?”

화가는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그는 약간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 물론 내가 그를 기쁘게 하려고 온갖 칭찬을 다 하지만. 난 나중에후회하게 될 말을 그에게 털어놓으면서도 그 말을 할 때면 이상한 기쁨을 느낀다네. 대체로 그는 나를매료시키고, 우린 화실에 앉아 수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그렇지만이따금씩 그는 대단히 생각이 없어 보이고, 나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상당한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만말이야. 해리, 그럴 때면 난 내 영혼 전체를 그에게 바친것만 같아. 비록 그는 그것을 자신의 코트에 꽂는 꽃이라든지, 자신의허영심을 충족시키는 장식물, 혹은 여름날의 장신구 정도로만 여기는 것 같지만.”

“바질, 여름날은 늦게저무는 법일세.” 헨리 경이 작게 말했다.”아마도 조만간자네가 그보다 먼저 지칠 것 같군. 생각만해도 안타까운 노릇이긴 하지만, 비범한 재능은 아름다운 보다 더 오래 남는 게 분명하지. 우리가모두 과도한 교육을 받느라 고통을 무릅쓰는 것은 바로 그 사실 때문이지. 생존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에서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어리석은 희망에 따라 더 오래 지탱할 수 있는 뭔가를 찾으려 하는데 그래서 우리 머릿속을 온갖 쓰레기와 사실들로채운다네. 철저하게 박식한 사람이야말로 현대의 이상이지. 한편그렇게 철저하게 박식한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끔찍할 걸세. 먼지를 뒤집어쓴 온갖 별난 것들이본래 가치보다 더 비싼 값을 받는 골동품 상점 같은 테니까. 어쨌거나 난 자네가 먼저 지칠 걸로 생각하네. 장차 자네의 친구를 바라보면서 그가 자네가 그릴 만한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든지, 혹은 그가 지닌 색상이든 뭐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될 걸세. 그럼자넨 마음속으로 그를 질책할 테고, 그가 자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걸 진지하게 떠올리게 되겠지. 훗날 그가 찾아오면 자넨 아주 차갑고 무관심해져 있겠지. 대단히애석한 노릇이지만 그래서 자네는 변하게 될 걸세. 자네가 지금까지 했던 말은 꽤 낭만적이었어. 예술의 낭만으로 거론할 만한 것이긴 한데, 종류를 불문하고 낭만적인것의 가장 나쁜 점은 결국 그것이 사람을 낭만적이지 않게 만든다는 거지.”

“해리, 그런 식으로 말하지말게. 내가 살아 있는 한 도리언 그레이의 개성은 나를 지배할 테니까.자넨 내가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해. 자넨 변덕이 심하니까.”

“오, 이보게, 바질,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그래서라네. 충직한 사람들은 사랑의 변변찮은 면밖에 알지 못하지만, 충직하지않은 사람들은 사랑의 비극까지도 알거든.” 헨리 경은 고상한 은빛 상자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마치 자신이 단 몇 마디로 세상을 요약하기라도 했다는 듯 수줍고 흡족한 빛을 띠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초록빛이도는 담쟁이덩굴의 잎사귀 속에서 참새가 짹짹거리며 부스럭댔고, 구름의 푸른 그림자가 마치 집어삼키기라도할 듯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정원은 얼마나 쾌적한가! 다른사람의 감정을 접하는 것은 또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건 그들의 생각을 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쁜일인 양 생각되었다. 한 사람의 고유한 영혼, 그리고 그에대한 친구들의 열정, 그러한 것들은 인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것이었다.그는 자신이 바질 홀워드와 이렇게 오래 함께 머무느라 빼먹어버린 지루한 오찬을 떠올리며 조용히 즐거워했다. 만약 그가 자신의 고모 댁에 갔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점잖은 신사들을 만났을 테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주는 일에 대해, 또 모범적인 하숙집의 필요성에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을 거였다. 각 계급은 각자 그러한 미덕의 중요성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았을 것인데, 그러한 것이 자신의 생활과는 상관없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들은 절약의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게으른 자들은 노동의 존엄함에 대해 열변을 토했을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가자신의 고모를 떠올렸을 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홀워드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보게, 친구, 이제 막 생각이 났네.”

“뭐가 생각났다는 건가, 해리?”

“도리언 그레이의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그곳이 어딘가?” 홀워드가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화내지 말게, 바질. 내 애거사 고모님의 집에서 들었다네. 그분이 아주 훌륭한 청년을찾아냈다고 말씀하셨거든. 이스트 엔드에서 고모님을 도와주기로 했다던데 그의 이름이 도리언 그레이였어. 고모님은 그의 용모가 훌륭하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지적해야겠군. 여성들은잘생긴 용모에 대한 식견이 없지. 특히나 훌륭한 여성은 말이지. 고모님은그가 진지하다고 말씀하셨다네. 또 천성이 아름답다고도. 난즉시 머릿속으로 그림을 떠올렸지. 안경을 끼고 길고 가는 머리카락에 주근꺠가 많으면서 큼직한 발로 쿵쿵대며걸어다니는 모습 말일세. 그가 자네 친구라는 걸 내가 진작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해리, 자네가 몰랐으니다행이네.”

“어째서?”

“난 자네가 그를 만나는 걸 원치 않아.”

“내가 그를 만나는 걸 원치 않는다고?”

“그렇다네.”

“도리언 그레이 씨가 화실에 와 계십니다, 도련님.” 집사가 정원으로 나오며 말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를 소개시켜 주겠군.” 헨리 경이 웃음을 터뜨리며 크게 말했다.

화가는 하인에게 돌아섰고, 하인은 햇볕 아래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파커, 그레이 씨에게 기다리라고 전해 줘요. 조금 있다가 들어갈 거니까.” 남자는 고개를 숙인 후 집 안으로들어갔다.

화가는 다시 헨리 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리언 그레이는 내 가장소중한 친구야.” 그가 말했다. “그는 단순하고 아름다운본성을 지녔지. 자네 고모님이 그에 관해 하신 말씀은 꽤 정확하다네.그를 망치지 말게. 그에게 영향을 주려 하지 말라고. 자네의영향은 나쁜 것일 테니. 세상은 넓고, 그 속에는 대단히놀라운 사람도 무수히 많지. 내 그림에 어떤 식으로든 마법을 불어넣어 주는 그를 빼앗아가지 말게. 예술가로서 내 인생은 그에게 달려 있어. 명심하게, 해리, 자넬 믿겠어.” 그는마치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말을 힘겹게 끌어내듯 아주 느리게 말했다.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린가!” 헨리경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홀워드의 팔을 붙잡고 집 안으로 거의 끌다시피 해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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