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움베르토 에코
차이의 존중을 사회의 근간으로 삼기로 결정한 문명에서 희극은 어떤 상황을 맞고 있는가? 전통적으로 희극은 불구자나 소경, 말더듬이, 난쟁이, 뚱뚱보, 백치, 일탈자, 평판이 나쁜 직업, 열등 민족으로 간주된 겨레 등에 의지해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 왔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이 금기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엔 감히 무고한 천민이나 천덕꾸러기를 흉내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몰리에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더 이상 의사들을 조롱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기들의 명예를 훼손했다 해서 의사들의 단체가 일제히 들고일어나 아우성을 칠 테니까 말이다. <셔츠 입은 검둥이>를 맛보는 것도 안 될 일이고, <폴란드 사람처럼 취해> 있는 <터키 사람 머리> 에게 <꼬마 검둥이>라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텔레비전의 코미디는 풍자의 대상을 텔레비전의 다른 방송물들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방송사간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각각의 프로그램은 다른 프로그램의 풍자와 조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인상을 주었고, 이 방송 저 방송의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편집해서 다시 보여 주는 프로그램이 유일하게 허용된 코미디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전통적으로 볼 때 대담하게 자기 스스로 조롱할 수 있는 자들은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이므로,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는 것이 바야흐로 힘의 과시가 되어가는 판국이다. 그 결과 희극의 실행 여부가 계급을 가르는 새로운 장벽이 되었다. 즉 옛날에는 마음 놓고 노예를 비웃는 데서 주인임이 인정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마치 노예들만이 주인을 조롱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드골의 코나 아니엘리의 주름살이나 미테랑의 송곳니를 아무리 웃음거리로 만든다 해도 놀림을 당하는 그들이 놀리는 자들보다 언제나 더 강한 쪽이 될 것임을 우리는 직감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희극은 성향 자체가 잔인하고 냉혹하다. 희극은 정말로 멍청한 백치를 원한다. 그를 조롱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의 치유할 수 없는 결함에 비추어 우리의 우월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결국 하나의 해결책이 필요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냈다. 동네의 백치를 희화 거리로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반민주적인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다. 그렇다면 그에게 발언권을 주고 생방송에 나가서 자기를 직접 소개하도록 권유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완전히 민주적이다. 실제의 마을에서처럼 예술적 표현의 매개물은 생략해도 된다. 사람들은 술주정뱅이를 흉내 내는 배우를 보고 웃는 것이 아니라 알코올 중독자에게 직접 술값을 내주고 그의 타락을 비웃는다.
성패는 판가름 났다. 동네 백치의 남다른 특성 가운데 하나가 노출증 환자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들 자신의 노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네 백치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으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상기하면 결과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엤날 같으면 한창 위기를 겪고 있는 어떤 부부의 남우세스러운 반목을 제삼자가 백일하에 폭로했을 경우 그 부부는 아마도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절이 변하여 부부가 자기들의 추잡한 싸움을 공공연하게 재현하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그런 특전을 간청하기에 이른 마당에, 도덕을 운위 할 자 그 누가 있으랴!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이론적인 틀의 놀라운 전도를 목격하게 된다. 즉 무해한 얼간이를 조롱하던 희극적인 인물을 퇴장하고 자기의 박약성을 스스로 드러내며 아주 행복해하는 정신박약자를 직접 등장시켜 스타를 만든다. 누구도 불만이 없다. 바보는 자기를 드러내서 좋고, 방송사는 배우에게 보수를 지급할 필요 없이 쇼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좋고,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가학증을 충족시키면서 타인의 어리석음을 조롱할 수 있어서 좋다.
이제 우리의 텔레비전 화면에 부쩍 자주 등장하게 된 사람들은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벌리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문맹자,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남색쟁이>라고 부르면서 즐거워하는 동성애자, 초로에 접얻르어서도 퇴색한 매력을 뽐내려고 하는 도화살 낀 여자, 음조가 맞지 않는 노래를 전문으로 하는 가수, <인간 잠재의식의 순환 회귀적 소멸> 따위의 현학적인 주장을 늘어놓으며 유식한 티를 내는 여자, 오쟁이를 지고도 희희낙락하는 사내, 미치광이 학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천재, 자비로 책을 내는 작가, 다음날 그 일이 항간의 화제가 되리라는 생각에 행복해하면서 뺨을 때리고 맞는 기자와 사회자 등이다.
동네의 백치가 매우 즐거워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면, 우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웃을 수 있다. 이제 바보를 비웃는 것은 다시금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 이른바 <정치적으로 반듯한> 태도가 되었다.
1992년
이세욱 옮김/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