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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Jul 03. 2017

미지의 섬

주제 사라마구/ 송필환 옮김

모른다는 것, 알지 못한다는 것

이 무한한 가치에 어찌 매혹당하지 않을 것인가!



1. 문을 두드리다


배 한 척만 주시오!


한 남자가 왕의 성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왕의 성에는 수없이 많은 문들이 있었다. 

남자가 두드린 것은 청원의 문이었다. 

왕은 대부분의 시간을 선물의 문 앞에서 아첨꾼들과 보내고 있었기에 누군가 청원의 문을 두드릴 때면 못 들은 척하기 일쑤였다(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왕에게 선물을 바치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성문의 청동 문고리를 쉴 새 없이 두드려서 소란스러워지면, 이웃 사람들의 불평이 커졌다. 게다가 백성들 사이에 '왜 왕은 우리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야'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때문에 왕은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그제야 일등 비서에게 청원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보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 일등 비서는 이등 비서를 부르고, 이등 비서는 다시 삼등 비서를 부르고, 삼등 비서는 일등 보좌관에게 명령하고, 일등 보좌관은 이등 보좌관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왕의 명령은 결국 왕궁을 청소하는 여인에게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청소부 여인은 더 이상 부릴 수 있는 아랫사람이 없었기에 청원의 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 문틈 사이로 물어보는 게 전부였다.


원하는 게 뭐죠?


원래 청원을 한 사람은 자신이 온 목적을 밝히고 나면 문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앉아, 명령이 전달되었던 역순으로 자신의 청원이 왕에게 전달되어 회신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왕은 언제나 선물을 바치고 아첨하는 자들과 시간을 보냈고, 백성의 안녕과 행복에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항상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백성의 청원에 귀 기울이기가 귀찮았던 왕은 청원서를 일등 비서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명하고는 다시 아첨꾼들과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일등 비서 역시 귀찮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이등 비서에게 일을 떠넘기고, 이등 비서 역시 삼등 비서에게 넘겨,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시 청소하는 여인에게까지 차례가 넘어왔다. 그러면 그녀는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가부를 판단하여 대답하고는 했다.

그런데 배를 달라고 했던 그 남자는 조금 달랐다.

청소하는 여인이 문틈으로 '원하는 게 뭐죠?'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벼슬이나 훈장 또는 상을 달라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왕께 할 말이 있소.


여인이 대답했다.


왕은 선물의 문에 계시기 때문에 이곳에 오실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그럼 가서 전하시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왕이 직접 들으러 올 때까지는 한 발짜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남자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담요를 뒤집어쓰며 문턱에 아예 드러누워버렸다. 때문에 성문을 드나들려면 그의 위로 지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일은 성문에서 백성들의 청원을 관리하는 규칙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 규칙이란, 청원의 문에서는 한 번에 한 사람만이 청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문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한 번에 딱 한 사람만! 청원의 문에서 오래도록 내려온 전통이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규칙이 왕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을수록 왕은 아첨하는 자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들이 보내온 선물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즐길 시간이 늘어날 테니까.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 규칙은 왕에게 훨씬 불리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왕의 대답이 청원자들이 예상하던 것보다 늦어지면, 자신의 차례가 빨리 돌아오지 않는 것에 불만이 점점 커지게 되어 여른이 흉흉해지고, 아첨꾼들이 보내오는 선물에도 즉각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삼 일이 지난 후, 왕은 여러 각도로 득실을 곰곰이 따져 본 다음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그 남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친히 청원의 문으로 행차했다.


물을 열어라!


왕이 청소하는 여인에게 말했다.


활짝 열까요, 아니면 조금만 열까요?


여인이 물었다.


왕은 잠시 망설였다. 문을 활짝 열어 길거리의 천한 백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왕은 잠시 생각을 한 다음 마음을 고쳐먹었다. 미천한 자와 문틈으로 속닥거리는 것이 자신의 고귀함에 손상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자와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곁에 있는 청소부 여인도 신경이 쓰였다. 나중에 그 남자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궁금해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상한 소문을 퍼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활짝 열거라!


왕이 명령했다.

삐걱거리며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를 원했던 남자는 누워 있던 계단에서 벌떡 일어나 담요를 둘둘 말고는 기다리는 자세를 취했다. 문이 열린다는 사실은 마침내 그의 요구를 처리해 줄 답변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광장을 서성이던 수많은 청원자들도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청원에 대한 대답이 있고 난 다음 비워지게 될 자리를 앞 다투어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예기치 않게 왕이 직접 나타나자 청원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라 창문 밖으로 목을 길게 빼고 청원의 문 쪽을 바라본 길 건너편의 이웃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로 청원의 문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배를 요구하던 그 남자뿐이었다. 비록 사흘이 걸리기는 했지만, 무엄하게도 왕을 직접 만나겠다는 자의 얼굴이 궁금해서라도 왕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이 적중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지만,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과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ㅇ벗는 상황 속에서 왕은 언짢은 투로 세 가지 질문을 연이어 던졌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네가 원하는 것을 왜 바로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느냐?


그러나 그 남자는 단지 첫 번째 질문에만 대답했다.


배 한 척을 주시오.


깜짝 놀란 왕이 순간 몸의 균형을 잃자 청소하는 여인이 재빨리 밀짚 의자를 받쳐 주었다. 그 의자는 청소부 여인이 뜨개질이나 바느질을 할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물론 청소를 하는 것이 그녀의 주된 일이었지만, 궁전에 있는 하인들의 양말 따위를 꿰매는 사소한 일도 그녀가 맡은 역할이었다.

밀짚 의자는 왕좌에 비해 무척이나 낮았기 때문에 불편했다. 왕은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다리를 오므려 보기도 하고 양쪽으로 벌려 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는 차분하게 왕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네가 배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


마침내 의자에서 나름대로 편한 자세를 잡은 왕이 말했다.


미지의 섬을 찾기 위해서요.


남자가 대답했다.

바다로 나가고 싶어 실성한 놈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자들에게 즉각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 왕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미지의 섬이라니?


남자가 다시 말했다.


미지의 섬.


멍청한 소리! 이제 더 이상 미지의 섬 같은 건 없어.


누가 더 이상 미지의 섬이 없다고 말했습니까?


모든 섬들은 지도에 나와 있다.


지도에 나와 있는 것들은 이미 알려진 섬들이죠.


네가 찾고자 하는 미지의 섬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그걸 말씀드릴 수 있다면, 그 섬은 이미 미지의 섬이 아니지 않은가요?


누군가 그 섬에 대해 네게 알려 준 적이 있느냐?


아무도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섬이 있다고 고집을 부리느냐?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미지의 섬이 하나도 없을 순 없기 때문입니다.


배가 필요해서 나를 찾아왔다고?


예. 배 한 척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도대체 넌 누구냐? 왜 내가 너에게 배를 주어야 하느냐?


그럼 당신은 누구시며, 왜 저에게 배를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까?


나는 이 왕국의 왕이고, 이 왕국 모든 배들의 주인이니라.


당신이 배들의 주인이 아니라, 배들이 당신의 주인이겠죠.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황당한 듯 왕이 물었다.


배가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란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 없이도 배들은 언제나 항해할 수 있다는 말이죠.


나의 항해사와 선원들은 내 명령에만 따른다.


항해사와 선원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배 한 척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네가 그 미지의 섬이란 걸 발견했다면, 그 섬은 내 것이 되는 거냐?


당신, 왕께서는 오직 알려진 섬들에만 관심이 있진 않으신가요?


더 이상 미지의 섬이 아니라면 역시 관심이 생길 수밖에.


어쩌면 그 섬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에게 배를 내주지 않겠다.


주실 겁니다.


청원의 문 근처에 모여 차분하면서도 확신에 찬 그 남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된 이후 시간이 지나수록 점점 인내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 남자에 대한 동성심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든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야 자신의 차례가 오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배를 주시오!

배를 주시오!


왕은 청소하는 여인에게 즉시 왕궁의 경비대를 불러 법과 질서를 되찾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창문 밖으로 목을 길게 내민 채 지켜보고 있던 이웃들까지도 다른 사람들과 합세하여 열렬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배를 주시오!

배를 주시오!


대중들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하고, 이미 반나절 동안 선물의 문을 비워 두며 놓친 것들을 생각하던 왕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는 말했다.


너에게 배 한 척을 주겠노라. 그러나 선원들은 네가 알아서 구해야 할 것이다. 나의 선원들은 이미 알려진 섬들을 위해 내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배를 원했던 남자가 감사를 표했지만 군중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입 모양으로 짐작하건대 감사합니다, 폐하. 선원들은 제가 구해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군중의 환호가 가라앉고 왕이 말했다.


부두로 가서 관리자에게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배를 내줄 것이다. 나의 명함을 가지고 가거라.


배를 받게 될 남자는 고개를 숙여 명함을 읽어 보았다. 청소하는 여인의 등을 받치고 글씨를 쓴 명함에는 왕의 이름이 왕이라는 직함 위에 날인되어 있었고, 다음 말들이 씌어 있었다.


이 명함을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배 한 척을 주어라. 혹시 사고라도 나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싶지는 않으니, 큰 배는 아니더라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왕의 배려에 감사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왕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다. 그 앞에는 청소하는 여인만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서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계단을 내려왔다. 드디어 다른 청원자들에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기회가 생겼다. 성문의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혼란이 벌어졌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청원자들은 청동 문고리를 두들기며 청소하는 여인을 불러 보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양동이와 걸레, 빗자루를 챙겨 다른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곳은 결정의 문이었다. 지금까지 거의 열린 적은 없었지만, 어떤 결정이 내려질 때면 사용되는 문이었다.

왜 청하는 여인이 걱정 가득한 눈길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가 배를 인수하기 위해 부두로 향하던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남자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왕궁을 쓸고 닦으며 보낸 시간들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이제 일자리를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배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자신이 진정 잘할 수 있는 일이었고, 적어도 바다에서는 청소하는 데 쓸 물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선원을 모집한다는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벌써 배를 정리하고 청소를 맡아 줄 사람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우리의 운명도 종종 이럴 때가 있다. 항상 d리 뒤에 따라다니다가, 이젠 끝났어. 알게 뭐야. 어차피 마찬가진데 뭘, 이라고 체념하며 중얼거릴 때, 운명이 우리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하는 것처럼 말이다.



2. 꿈속으로 떠나는 항해

걷고 또 걸어 항구에 도착한 남자는 부두의 관리자를 찾았다. 부두 관리자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한쪽에 정박되어 있는 배들을 보며 어느 것이 자신의 배가 될지 생각해 보았다.

큰 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왕의 명령함에도 그러한 사실은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객선, 상선, 전함 등은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다의 사나운 바람과 파도를 견뎌낼 수 없는 작은 배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은 그 부분에 대해서도 명시해 두었다.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왕의 지시였다. 따라서 돛단배, 거룻배, 나룻배 등 도 제외되어야 했다. 그 배들로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는 있지만, 미지의 섬을 찾을 수 있을 만큼, 큰 바다의 험난한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남자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큰 통들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청소부 여인도 부두에 묶여 있는 배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바로 저 배가 딱 내 취향이군.


아직 채용되지도 않았기에 자신의 의견이 반영될 리 없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먼저 부두 관리자의 말을 들어 보아야 했다.

마침내 부두 관리자가 도착했다. 왕의 명함을 읽은 그는 남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왕이 잊어버리고 미처 물어보지 못한 것을 물었다.


배를 몰 줄은 아슈? 면허증은 있소?


남자가 대답했다.


바다에서 배우겠소.


관리자가 말했다.


제발 그만두쇼. 나도 선장이지만 아무 배나 몰고 거친 바다로 나가지는 않소이다.


그러니 항해할 수 있는 적당한 배를 주시오. 아니, 저런 것들 말고, 내가 존중할 수 있고 나를 존중해 줄 수 있는

그런 배 말이오.


말은 뱃사람들처럼 하고 있지만, 당신은 뱃사람이 아니지 않소.


내가 뱃사람처럼 말했다면 이미 뱃사람이 아니겠소?


부두 관리자는 다시 왕의 명함을 들여다본 뒤 남자에게 물었다.


배가 왜 필요한지 말해 줄 수 있소?


미지의 섬을 찾아가려고요.


더 이상 미지의 섬은 없소.


왕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섬들에 대해 왕이 알고 있는 것은 다 내가 알려 준 것이지.


바닷 사람인 당신까지 더 이상 미지의 섬이 없다고 말하니, 이해할 수가 없군. 모든 섬들은, 비록 이미 알려진 섬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미지의 섬이란 것을 뭍 사람인 나조차도 알고 있는데.


아니 그럼, 당신은 누구도 발을 디뎌 본 적이 없는 그런 섬을 찾아가겠다는 거요?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알게 되겠지.


만약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그래요. 어쩌면 거친 바다에 난파될 수도 있겠죠.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내가 어느 지점까지 갔는지 항무연보에 기록해 놓아야만 할 것이오.


그 말은 어찌 되었든 갈 데까지 가 보겠다는 뜻이군.


부두 관리자가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적당한 배를 주겠소.


어떤 뱁니까?


아주 경험이 많은 배요. 모든 사람이 미지의 섬을 찾아 떠나던 시절 때부터 있었던……


어떤 거죠?


심지어 몇 개의 섬을 발견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배요.


아 글쎄 어느 배냐니까?


저 배요.


부두 관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차리자마자 청소하는 여인이 통 뒤에서 쏜살같이 뛰어나와 소리쳤다.


저 배는 내 거예요. 내 거라고요!


갑자기 나타난 여인이 왜 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지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다만 남자는 그녀가 저 배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범선처럼 보이는군요.


남자가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처음에는 전통적인 범선이었지만 여러 차례 개조해서 현대화되었죠.


관라자가 남자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범선인 걸.


그래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돛이랑 닻도 있네요.


미지의 섬을 찾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지.


곁에 있던 여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소리쳤다.


저 배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당신은 누구요?


남자가 물었다.


날 기억하지 못하세요?


글쎄.


난 청소하는 여자예요.


청소?


왕궁에서요.


청원의 문을 열어 주었던?


나밖엔 없었으니까.


아니, 그런데 왜 왕궁을 청소하거나 문을 열어 주지 않고 이곳에 있는 거요?


진실로 내가 원하던 문이 열렸어요. 이제부터 나는 오직 배만 청소할 거예요.


그래서 나를 따라 미지의 섬을 찾아가기로 했단 말이오?


결정의 문을 통해 왕궁을 나와버렸어요.


그렇다면 범선으로 가서 한번 둘러보시오.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니 반드시 청소가 필요할 거요. 그리고 갈매기들을 조심하소. 믿을만한 놈들은 아니니까.


나를 데려가 다신 배를 구경시켜 주고 싶진 않다는 건가요?


당신 배라고 하지 않았소?


미안해요. 단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거예요.


좋아한다는 것은 소유하는 최선의 방법일 거요. 소유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최악의 방법일 테지만.


부두 관리자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배의 주인에게 열쇠를 인도해야 하오.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인인지 알아서 결정하시오. 난 누가 되든 상관없으니.


배에도 열쇠가 있소?


남자가 물었다.


배에 오르는 데는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배 안에는 창고며 화약 저장고, 항해일지가 들어 있는 선장의 책상도 있다오.


이 여자가 모든 걸 알아서 할 거요. 나는 선원들이나 구하러 가봐야겠소.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청소부 여인은 부두 관리자의 사무실에서 열쇠를 받아 배에 올랐다. 여인이 들고 있는 두 가지 물건이 꽤 유용하게 쓰였다. 왕궁에서 쓰던 빗자루와 양동이가 갈매기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적절했던 것이다.


부두와 배를 연결하는 널빤지를 채 지나기도 전에 부리를 크게 벌린 갈매기들이 사납게 소리를 질러대며 삼켜 버릴 듯 한 기세로 여인을 위협했다. 하지만 놈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여인은 양동이를 내려놓고 열쇠를 가슴팍에 꽂고는 양쪽 발을 널빤지에 단단히 고정시킨 채, 마치 중세 기사들의 거대한 검처럼 빗자루를 휘둘러 그 흉측한 무리들을 쫓아 버렸다.


여인은 배에 오르고 나서야 왜 그토록 갈매기들이 포악하게 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방에 갈매기 둥지들이 널려 있었다. 대부분은 버려진 것들이었지만 아직 알들이 남아 있는 둥지들도 있었고, 더러는 부리를 한껏 벌려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어린 갈매기들도 있었다. 여인이 말했다.


그래, 하지만 이제 자리를 비켜 줘야겠어. 미지의 섬을 찾아 떠나는 배가 닭장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 되니까.

여인은 빈 둥지들은 바다에 던져 버렸다. 새끼들이 남아 있거나 아직 부화가 되지 않은 알이 있는 둥지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러고 난 다음 소매를 걷어붙이고 갑판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힘들게 갑판 청소를 한 여인은 돛을 보관한 창고의 문을 열어 꼼꼼하게 바느질 상태를 점검했다. 오랜 시간 동안 바다를 항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센 바람을 견뎌 본 것도 오래전 일일 것이다.


돛은 배의 근육과도 같은 것이어서 힘이 가해졌을 때 얼마나 팽팽하게 부푸는지 봐야 해. 규칙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늘어지고 물러져서 신축성을 잃게 되지. 그리고 바느질은 돛의 신경과도 같은 거야.


여인은 항해술에 대해 그토록 빠르게 습득해 가는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청소부 여인은 바느질이 풀어진 곳을 여러 군데 발견했지만 꼼꼼히 표시만 해 두었다. 예전, 아니 어제까지 왕궁에 있던 하인들의 양말을 꿰매는 데 사용하던 바늘과 실로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창고를 열어 보았지만 모두 비어 있었다. 화약고도, 처음엔 쥐똥인 줄 알았던 새까만 먼지를 제외하고는 역시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청소하는 여인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미지의 섬을 찾아가기 위해 떠나는 배가 전쟁에 대비하는 전함처럼 철저하게 준비되어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식량 창고마저 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왕궁에서 지낼 때부터 조금씩 먹는 것에 단련이 된 그녀는 자신은 별 상관이 없었지만 남자가 문제였다. 이제 곧 해가 질 것이고, 그가 돌아오면 배가 고프다며 불평할 것이 분명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다 똑같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자신들만이 허기진 배를 가졌고 또 배를 채워야 하는 고통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다.


그나저나 선원이라도 구해 오면 어쩌지? 무지막지하게 먹어 댈 텐데. 그럼 어쩐다지?


청소하는 여인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토록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남자가 부두의 끝자락에 모습을 드러낸 때는 해가 바닷속으로 막 잠기는 순간이었다. 손에는 한 꾸러미의 봉투를 들고 있었다. 혼자였고,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낙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인은 부두와 배를 연결하는 널빤지로 나갔다. 선원을 구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냐고 채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남자가 말했다.


염려 말아요. 우리 둘이 먹을 건 가지고 왔으니까.


선원들은요?

여인이 물었다.


보다시피 아무도 함께 오지 않았소.


알아보기는 하셨어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모두들 더 이상 미지의 섬은 없다고 하더군요. 혹 그런 섬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렵고 험난한 항해를 하던 시절처럼 불가능한 일을 찾아서 평화로운 가정과 안락한 삶을 버리고 거친 바다로 나갈 사람은 없을 거라는군요.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바다는 언제나 무섭다고 했죠.


그럼, 미지의 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도 아는 것이 없는데 그들에게 뭐라고 할 수 있겠소.


그렇지만 미지의 섬이 있다고 확신하잖아요?


바다가 항상 무섭다는 것만큼이나.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보면, 저 바다는 옥빛이고 하늘은 불타는 듯 노을이 아름다울 뿐이에요. 무서운 것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잖아요.


그것은 당신의 착각일 뿐이오. 때론 섬들도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건 실체가 아니오.

선원을 못 구한다면 어쩌실 거죠?


나도 아직 모르겠소.


우린 여기서 지낼 수도 있을 거예요. 나는 부두로 들어오는 배들을 청소하며 지낼 수도 있지만, 당신은?

나?


당신한테도 어떤 기술이나 직장이 있어야 해요. 요즘 말하는 직업 말이에요.


나도 있소. 아니, 있었고 또 필요하다면 가질 거요. 하지만 지금은 미지의 섬을 찾고 싶소. 그곳에 도착한다면 내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소.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당신도 당신 스스로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누군지 절대 알지 못할 거요.


왕의 철학자도 할 일이 없을 땐 내가 하인들의 양말 꿰매는 걸 곁에서 지켜보곤 했었죠. 그리고 때론 무언가 알쏭달쏭한 말을 건넨 적이 있었어요.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나의 섬이라고. 하찮은 일을 하는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었기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섬을 보기 위해선 섬을 떠나야 해요. 우리 자신을 떠나지 않고선 우리를 볼 수 없죠.


당신 말뜻은 우리가 스스로를 떠나지 못한다는 건가요?


그런 뜻이 아니오.


불타던 노을이 사그라지고 있었고 바닷물은 갑자기 검붉어지고 있었다. 이제 청소하는 여인도, 적어도 어떤 시간에는 바다가 무서운 곳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남자가 말했다.


철학은 왕의 철학자에게 맡겨 둡시다.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이니. 이제 요기나 합시다.


하지만 여인은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


먼저 당신의 배를 꼼꼼하게 살피셔야 해요. 겨우 겉만 보셨잖아요.


무슨 문제가 있소?


돛의 바느질을 손봐야겠어요.


배 바닥까지 내려가 봤소? 물이 스며들진 않던가요?


돌도 있고 물도 약간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배의 균형을 위해 원래 있었던 것 같아요. 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런 것들을 어디서 배웠소?


그냥 알았어요.


그냥 어떻게?


당신도 부두 관리자에게 항해하면서 배울 거라고 했잖아요?


우리는 아직 항해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이미 물 위에 있잖아요.


항해를 위한 진정한 스승은 둘 뿐이라고 생각해 왔소. 하나는 바다이고, 나머지 하나는 배요.


하늘도요. 하늘을 잊었군요?


그래요. 하늘도 있군요.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그래요, 하늘.


배를 둘러보는 데는 십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비록 개조돼기는 했지만 범선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남자가 말했다.


멋지군. 그런데 배를 조종할 선원을 구하지 못하다면 더 이상 배가 필요 없다고 왕에게 가서 말할 수밖에 없겠는걸.


첫 번째 난관에 쉽게도 포기하는군요.


첫 번째 난관은 왕을 기다리던 삼 일이었소. 그때 난 포기하지 않았소.


당신이 함께 갈 선원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우리 둘 만이라도 떠나요.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오? 단 두 사람으로 어떻게 배를 조종한단 말이오? 나는 항상 조종 키를 잡고 있어야 하고, 당신은, 아니 뭐 설명할 필요도 없지. 어쨌든 그건 미친 짓이오.


하여간 그건 나중에 두고 보고, 이제 요기나 하죠.


그들은 배 후미의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에도 남자는 계속해서 미친 짓이라며 투덜거렸다. 자리를 마련한 뒤, 청소하는 여인은 남자가 가지고 온 꾸러미를 풀었다. 빵 한 덩어리와 딱딱하게 굳은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 올리브 열매 그리고 포도주 한 병이 있었다. 달은 이미 바다 위로반 뼘 가량 올라와 있었고 돛과 가름대의 그림자가 그들 가까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 범선 정말 멋지죠?


여인이 말했다. 그러나 곧 다시 수정했다.


당신의, 당신의 범선.


이 배가 오랫동안 내 것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이 배로 항해를 하건 말건, 이 배는 당신 거예요. 왕이 당신에게 주었잖아요.


미지의 섬을 찾기 위해 왕에게 부탁했던 거요.


그러나 이런 일들이 모든 완벽하게 진행될 순 없잖아요? 시간을 좀 가지고 생각해 봐요. 예전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바다로 나가려면 뭍에서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요. 할아버지가 뱃사람은 아니셨지만…….


선원이 없다면 항해는 불가능하오.


그 애긴 아까도 했어요.


예측도 할 수 없는 이런 항해엔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하오.


물론이죠 게다가 좋은 절기를 기다려야 하고 조수도 알맞아야 하고, 우리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해 줄 사람들도 부두로 나와야 하고……


날 놀라는 거요?


나를 결정의 문으로 나오게 만든 사람을 놀리다니요?


아니라면 미안하오.


어쨌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다시 그 문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달빛이 청소하는 여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예쁘군, 정말 예뻐.


남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범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청소하는 여인도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사흘 동안, 가끔씩 성문을 조금 열어 볼 때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 조각의 빵과 치즈, 한 방울의 포도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올리브 열매 씨들은 바다로 던져졌고 바닥은 여인이 마지막 걸레질을 했을 때처럼 깨끗했다. 부두를 떠나는 여객선의 힘찬 기적 소리가 마치 리바이어던의 포효처럼 들려왔다.

여인이 말했다.


우리가 출항할 땐 저렇게 소란스럽게 떠나지 말아요.


도크 안에 있었지만 거대한 여객선이 물살을 갈며 만들어낸 파도에 배가 조금 기우뚱거렸다.

남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기우뚱거릴걸.


둘은 낄낄대며 웃었지만 곧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누군가가 잠을 자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졸려서 그런 건 아니지만.


다른 누군가도 동의했다.


나도 그래요.


그리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달은 계속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여인이 말했다. 


아래에 침대는 있겠죠?


남자가 대답했다.


그렇겠죠.


그들은 일어나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여인이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저는 이쪽으로 갈게요.


저는 이쪽으로 가죠. 내일 봅시다.


남자가 대답했다. 누구도 좌현, 우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직 완전한 뱃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이 돌아보며 말했다.


참 깜박 잊었네요.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두 개의 양초 토막을 꺼냈다.


청소하다가 찾았어요. 그런데 성냥이 없어요.


내게 있소.


남자가 말했다.


그녀는 양손에 양초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남자가 성냥을 그었고 손가락을 구부려 둥그렇게 만들어 불꽃 주위를 감쌌다. 조심스럽게 양초의 심지에 성냥불을 대자 마침내 불이 옮겨 붙었다. 불꽃은 마치 달빛처럼 천천히 부풀어 여인의 얼굴을 밝혔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여인의 생각은 이랬다.


그래, 정말 멋져. 하지만 저사람의 눈길은 오직 미지의 섬으로만 향하고 있는지도 몰라. 사람들은 눈빛에 쉽게 속아, 적어도 처음에는.


여인이 남자에게 양초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내일 봐요. 안녕히 주무세요.


남자는 같은 말이라도 약간 다른 표현을 쓰고 싶었다.


좋은 꿈 꾸시오.


애석하게도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전부였다. 아마도 잠시 후 아래로 내려가 침대에 눕게 되면 그제야 단둘이 있을 때 했어야 할 좀 더 감동적이고 멋진 표현들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제 그만 자야겠지, 아니, 잠들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남자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러고 난 후 상상에 빠져들었다. 남자는 그녀를 찾아 헤매었지만 어디에서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거대한 배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꿈이란 묘한 마법사 같은 것이다. 사물들의 크기와 거리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함께 있는 사람을 떼어 놓기도 하고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함께 있게도 한다. 여인은 지척에 잠들어 있고, 쉽게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지만, 남자는 어떻게 그녀에게 다가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3. 미지의 섬


여인에게 좋은 꿈을 꾸라고 했지만 밤새 꿈을 꾼 쪽은 오히려 남자였다. 그의 범선이 세 개의 삼각돛을 활짝 펼치고 파도를 가르며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하는 꿈이었다.

그는 키를 잡고 있었고 선원들은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미지의 섬을 찾아가겠다고 했을 때 하나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선원들이 어떻게 배에 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노골적으로 비웃었던 것이 미안했거나 그들 역시 미지의 섬을 찾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갑판 위 여기저기에 동물들이 노니는 것도 보였다. 오리, 토끼, 닭 등 대부분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이었다. 동물들은 선원들이 던져 주는 옥수수 알갱이와 배추잎을 뜯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언제 동물들을 배에 실었는지조차 도저히 기억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그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예전에 겪었던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생각해 볼 때, 미지의 섬이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누구나 알겠지만 토끼장의 문을 열고 토끼의 귀를 잡아당겨 꺼내는 것이 온 산과 계곡을 뛰어다니며 토끼를 쫓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쉬었다. 그 순간, 창고의 아래쪽에서 말들이 히히힝, 소들이 음매, 당나귀들이 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든 일을 할 때 필요한 귀한 동물들의 울음소리였다.


어떻게 저런 짐승들을 태웠을까? 선원들이 있기에도 공간이 부족할 텐데.


그때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돛이 바람에 나부끼며 흔들렸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도 돛에 가려 보지 못했던, 선원들의 수만큼 됨직한 한 무리의 여인들이 분주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남자가 할 일을 여자가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꿈인 것이 틀림없었다. 현실에서는 누구도 이런 식으로 항해하지 않았다. 키를 잡고 있던 남자는 갑판 위 이곳저곳으로 눈길을 던지며 청소하는 여인을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갑판을 청소하고 난 뒤 너무 힘이 들어 우현의 침대에서 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단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제야 떠올렸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배가 떠나려는 순간 함께 가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부두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안녕, 잘 가요! 당신의 눈빛엔 오직 미지의 섬밖에 없어요. 나는 떠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닐지도 몰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자의 눈은 보이지 않는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 순간 하늘이 구름으로 덮이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자 갑판 벽을 따라 놓아둔, 흙이 담긴 자루에서 수많은 식물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미지의 섬에 흙이 모자랄까 봐 준비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흙을 미리 준비해 가면 밭을 일구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미지의 섬에 도착하는 날, 갑판 위의 작은 화단에서 싹을 틔우고 있는 씨앗들과 과일나무들을 옮겨 심고 봉우리를 터뜨리는 꽃들을 예쁘게 장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키를 자복 있던 남자는 갑판에서 쉬고 있는 선원들에게 혹시 어떤 섬이라도 보았는지 물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이 살고 있는 어떤 곳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배를 정박할 수 있고, 술 한 잔 마실 수 있는 술집이 있고 편히 쉴 수 있는 침대가 있다면 그곳에 내려 정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배에 함께 있을 순 없다고 했다.


혹시 아무도 살지 않는 미지의 섬에 닿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소?


키를 잡고 있는 남자가 물었다.


미지의 섬은 없소. 당신의 헛된 생각일 뿐이란 말이오. 왕의 지리학자들이 지도를 확인하기 위해 모든 곳을 샅샅이 뒤졌고 더 이상 발견할 땅은 남아 있지 않다고 이미 오래전에 천명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왜 도시에 남아 있지 않고 여기서 남의 항해를 방해하고 있는 거요?


우리는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고 있었소. 그래서 당신의 배를 이용한 것뿐이오.


그러니까 당신들은 선원이 아니군요.


우린 바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오.


나 혼자서 이 배를 조종할 순 없소.


왕에게 배를 달라고 하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어야지. 바다가 항해를 가르쳐 주진 않아.


그때 키를 잡고 있던 남자가 멀리 있는 육지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이 세상 저편에 있는 다른 땅의 신기루라며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바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곳이 바로 자신들이 내릴 곳이라고 주장했다.


저곳은 지도에 나와 있는 섬이오. 우리를 저곳에 데려다주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겠소!


사람들이 소리쳤다. 그러자 범선은 저절로 육지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고 항구로 들어가 부두에 정박했다.


자, 이제 가시오.


키를 잡은 남자가 말했다.


순서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여자들이 먼저 내렸고, 이어 남자들이 뒤를 따랐다. 단지 그들만 내린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리, 토끼, 닭까지 데리고 내렸고 소, 당나귀, 말도 남겨 두지 않았다. 심지어 갈매기까지 하나둘 하늘로 날아올랐다. 둥지에 남아 있던 어린 새 끼마 저 부리로 물어 옮기기 시작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질서 정연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떠나는 그들을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그들은 나무와 밀과 꽃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범선의 돛과 벽을 휘감아 오르며 아름답게 장식된 넝쿨나무도 그대로 두었다. 배에서 서둘러 내리는 중에 쌓아놓았던 흙 포대들이 터진 건지 갑판은 잘 일구어지고 씨가 뿌려져 있는 밭처럼 보였다.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는 조금만 더 비가 내려주면 될 것 같았다. 

미지의 섬을 찾아 떠난 이후로 남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유는 그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 꿈속에 한 조각의 빵이나 사과가 나타난다면 그건 좀 어색해 보일 것이다.

나무의 뿌리들이 배에 가로로 놓여 있는 나무 뼈대를 뚫고 뻗어 나오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하늘로 솟아 잇는 돛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될 것 같았다. 바람을 감싸 안은 무성한 나뭇잎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지까지 항해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배는 출렁이는 파도를 따라 바다를 떠다니는 숲이 되었다. 그 숲에서,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어딘가에 숨어 있던 새들이 홀연 햇빛 속으로 나타나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곡식들이 영글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추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조종키를 고정시킨 뒤 한 손에 낫을 들고 갑판으로 내려갔다. 첫 번째 싹을 잘랐을 때, 남자는 자신의 그림자 곁에 있는 또 다른 그림자를 보았다.

남자는 청소하는 여인을 품에 안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 역시 남자를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섞여 있었고 둘의 침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곳이 좌현이었는지, 우현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해가 뜰 무렵, 남자와 여자는 뱃머리의 좌우에 하얀 글씨를 칠했다. 그때까지 지어주지 못했던 배의 이름이었다.

정오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마침내 ‘미지의 섬’이 자신의 이름과 같은 섬을 찾아 파도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림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The Fighting Temeraire)/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839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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