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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Oct 15. 2017

원숭이 섬

다자이 오사무/ 송태욱 옮김

아득히 멀리서 바다 건너 이 섬에 도착했을 때의 내 우울을 생각해보게. 밤인지 낮인지, 섬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잠들어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섬 전체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애를 썼다. 벌거벗은 커다란 바위가 급한 경사를 이루며 수없이 쌓여 있고 군데군데 시커먼 동굴 입구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건 산일까? 싱싱한 풀 한 포기 없다.

나는 바위산 기슭을 따라 비틀비틀 걸었다. 괴이하게도 이따금씩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먼 데서도 아니다. 늑대일까? 곰일까? 그러나 긴 여행의 피로로 나는 대담해져 있었다. 나는 이런 포효조차 신경 쓰지 않고 섬을 돌아다녔다.

나는 섬의 단조로움에 놀랐다. 걸어도, 걸어도 계속해서 딱딱한 길이다. 오른쪽은 바위산이고 바로 왼쪽에는 까칠한 각섬석이 거의 수직으로 우뚝 솟아 있다. 그 사이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2미터쯤의 폭으로 평탄하게 쭉 이어지고 있다.

길이 끝나는 데까지 걸어가 보자. 말로 다할 수 없는 혼란과 피로로부터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얻고 있었다. 나는 길이 바위산을 빙 돌아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나는 같은 길을 두 번쯤 빙 돌았음에 틀림없다. 나는 섬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을 알았다.

안개는 점차 옅어지고 산 정상이 바로 내 이마 위로 덮쳐 누르듯 보이기 시작했다. 봉우리가 세 개. 한가운데 둥근 봉우리는 높이가 3,4백 미터나 될까. 갖가지 색깔의 평평한 바위가 겹쳐 있고 그 한쪽 경사가 완만하게 흘러 작고 뾰족한 옆 봉우리의 중턱 주변까지 미끄러져 내렸으며, 또 부푼 곳이 불퉁불퉁 솟아나 널찍한 언덕이 되어 있었다. 폭포 부근의 바위는 물론 섬 전체가 짙은 안개 때문에 검푸르게 젖어 있었다. 나무 두 그루가 보였다.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에 한 그루. 떡갈나무 비슷한 것이. 언덕 위에도 한 그루. 정체를 알 수 없는 굵직한 나무가. 그리고 나무는 모두 시들어 있었다.

나는 이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고 잠시 멍했다. 안개는 점차 엷어졌고 햇빛이 봉우리 한가운데를 비치기 시작했다. 안개에 젖은 봉우리가 빛났다. 아침 해다. 그게 아침 해인지 저녁 해인지 나는 그 향기로 식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새벽일까?

나는 기분이 약간 상쾌해져 산을 기어올랐다. 겉보기에는 험해 보였지만 이렇게 올라보니 또박또박 발 디딜 곳이 있어서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드디어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기어올랐다.

여기에는 아침 해가 똑바로 비쳤고 뺨에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떡갈나무 비슷한 나무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건 진짜 떡갈나무일까, 아니면 졸참나무나 전나무일까? 나는 우듬지까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시들어 버린 가느다란 대여섯 개의 가지가 하늘로 향하고 있고, 가까이에 있는 가지는 대체로 보기 흉하게 꺾여 있었다. 올라가 볼까.

           눈보라 소리 

           나를 부른다

바람소리겠지. 나는 척척 오르기 시작했다.

           포로가 된 

           나를 부른다

정신적인 피로가 심하면 갖가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법이다. 나는 나뭇가지 끝까지 올랐다. 우듬지의 마른 가지를 두세 번 바스락바스락 흔들어보았다.

           생명력이 부족한

           나를 부른다

발을 디디고 있던 마른 가지가 뚝 부러졌다. 실수로 나는 나무를 타고 줄 줄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부러졌네.”

바로 머리 위에서 그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나는 나무에 기대어 일어나 얼빠진 눈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아아. 전율 이내 등을 타고 흘렀다. 아침 해를 받아 금색으로 빛나는 절벽을 원숭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 내려왔다. 내 몸 안에서 그때까지 잠들어 있던 것이 일시에 반짝 빛났다.

“내려와. 가지를 부러뜨린 건 나야.”

“그건 내 나무야.”

절벽을 다 내려온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눈이 부신 듯 이마에 많은 주름을 만들며 내 모습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이윽고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음은 나를 초조하게 했다.

“이상해?”

“이상해.” 그는 대답했다. “바다를 건너왔지?”

“응.” 나는 폭포가 시작되는지 점에서 보글보글 솟아나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비좁고 답답한 상자 안에서 보낸 긴 여로를 회상했다.

“뭔지는 잘 모르지만 큰 바다를?”

“응.” 다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역시, 나와 같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폭포의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다. 어느새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고향이 같으니까. 척 보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우리 고향에서 온 자들은 다들 귀가 빛나니까.”

그는 내 귀를 세게 잡아 올렸다. 나는 화가 나서 장난을 하는 그의 오른손을 할퀴었다. 그리고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나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요란한 외침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꼬리가 굵고 털투성이인 원숭이가 언덕 꼭대기에 진을 치고 우리에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일어섰다.

“그만둬, 그만둬. 우리한테 그러는 게 아니야. 만날 으르렁대는 놈이지. 매일 아침 저렇게 해를 보고 으르렁거리는 거야.”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산의 봉우리에도 원숭이가 잔뜩 무리를 지어 등을 둥글게 하여 아침 해를 쬐고 있었다.

“저게 다 원숭이야?”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러나 우리랑은 다른 원숭이야. 고향이 다르거든.”

나는 그들을 한 마리 한 마리 꼼꼼히 살펴보았다. 더부룩한 하얀 털에 아침 바람을 맞으면서 새끼 원숭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놈. 크고 빨간 코를 하늘로 향하고 뭔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놈. 멋진 줄무늬 꼬리를 흔들면서 햇빛 속에서 교미를 하고 있는 놈. 찡그린 얼굴로 바쁜 듯이 여기저기를 산보하는 놈.

나는 그에게 소리 죽여 물었다.

“여긴 어디지?”

그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나도 몰라. 그러나 일본은 아닌 것 같아.”

“그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이 나무는 기소 떡갈나무 같은데.”

그는 돌아보며 고목을 탁탁 쳐보고는 오랫동안 우듬지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아니야. 가지가 나는 방식이 달라. 게다가 나무껍질에 햇빛이 반사되는 것도 희미하잖아. 뭐, 싹이 나는 걸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나는 선 채 고목에 기대어 그에게 물었다.

“왜 싹이 안 나오지?”

“봄부터 말라 있는걸. 내가여기에 왔을 때도 말라 있었어. 그때부터 4월, 5월, 6월 세 달이나 지났는데 시들어가기만 하는 거야. 어쩌면 이건 삽목일지도 모르겠는데. 아마 뿌리가 없을 거야. 저 나무는 더 심한걸. 저놈들 똥 투성이야.”

그렇게 말하고 그는 으르렁거리는 한 무리의 원숭이를 가리켰다. 으르렁 거리던 원숭이는 이제 울음을 멈췄고 섬은 비교적 평온했다.

“앉지 그래. 이야기를 해 보자고.”

나는 그에게 딱 붙어 앉았다.

“여긴 좋은 곳이지? 이 섬 안에서는 여기가 가장 좋아. 해가 잘 들고 나무도 있고, 게다 가물 소리도 들리고.” 그는 발밑의 조그만 폭포를 만족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난 일본 북쪽 해협 근처에서 태어났어. 밤이 되면 파도소리가 희미하게 철썩철썩하고 들려왔지. 파도소린 참 좋아. 왠지 심금을 울리거든.”

나도 고향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난 물소리보다는 나무가 그리워, 일본 중부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났으니까. 푸른 잎 냄새는 참 좋아.”

“그건 좋지. 모두들 나무를 그리워해. 그러니까 이 섬에 있는 놈은 누구든 하나라도 나무가 있는 곳에 앉고 싶어 하지.”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가랑이의 털을 가르고 검붉은 깊은 상처를 몇 군데나 나에게 보여주었다. “여기를 내 영역으로 만드는 데 이런 고생을 한 거야.”

나는 이 장소에서 떠나자고 생각했다. “난 몰랐어.”

“괜찮아. 상관없어. 난 외톨이야. 지금부터 여길 우리 둘의 영역으로 해도 좋아. 하지만 이제부터는 가지를 부러뜨리지 않도록 해.”

안개가 걷히고 활짝 개자 바로 우리 눈앞에 이상한 풍경이 나타났다. 푸른 잎. 우선 그것이 내 눈에 스며들었다. 나는 지금이 무슨 계절인지 확실히 알았다. 고향에서는 메밀 잣밤나무의 어린잎이 한창 아름다울 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 나무들의 푸른 잎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도취도 순식간에 깨졌다. 나는 다시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푸른 잎 밑에는 물을 뿌린 자갈길이 산뜻하게 깔려 있고 하얗게 단장한 파란 눈의 인간들이 줄줄이 걷고 있었다. 눈부신 새털을 머리에 꽂은 여자도 있었다. 뱀가죽으로 만든 굵은 지팡이를 느릿느릿 흔들면서 좌우로 미소를 보내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와들와들 떠는 내 몸을 세게 안고 빠르게 속삭였다.

“놀라지 마. 매일 이러니까.”

“어떻게 된 거야? 다들 우리를 노리고 있어.” 산에서 붙잡혀 이 섬에 도착할 때까지의 나의 무참한 경력이 떠올라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구경거리야. 우리의 구경거리지. 잠자코 보고 있어. 재미있는 일도 있으니까.”

그는 빠른 어조로 그렇게 가르쳐주고 한 손으로는 내 몸을 계속해서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기저기 인간들을 가리키면서 소곤소곤 이야기해주었다. 저건 유부녀라고 하는데 남편의 장난감이 될지 남편의 지배자가 될지 두 가지 생활 방식밖에 모르는 여자이고, 어쩌면 인간의 배꼽이라는 것이 저런 형태인지도 몰라. 저건 학자라고 하는데, 죽은 천재에게는 폐가 되는 주석을 붙이고 태어나는 천재는 꾸짖으면서 밥을 먹고사는 이상한 놈이야. 나는 저것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졸려. 저건 여배우라고 하는데, 무대에 있을 때보다 맨얼굴로 있을 때가 더 연극을 잘 하는데, 아아아, 또 내 어금니의 충치가 아파오는군. 저건 지주라고 하는데, 나 역시 노동을 하면 끊임없이 변명만 늘어놓는 도량이 좁은 자이지만, 난 저 모습만 보면 콧날을 따라 이가 기어가는 듯한 답답함을 느껴. 그리고 저기 벤치에 앉아 있는 하얀 장갑을 낀 남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인데, 봐, 저놈이 여기에 나타나면 중천에 벌써 노란 똥의 구린 맹렬한 회오리가 일어나거든.

나는 그의 요설을 비몽사몽간에 듣고 있었다. 나는 다른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네 개의 눈을. 파랗고 맑은 인간 아이의 눈을. 조금 전부터 그 두 명의 아이는 섬 외곽에 쌓아놓은 각섬석 담장 위로 겨우 얼굴만 내놓고 탐하듯이 섬을 둘러보고 있다. 둘 다 남자아이일 것이다. 짧은 금발이 아침 바람에 부스스하게 춤을 춘다. 한 아이는 주근깨에다 코가 새까맣다. 다른 아이는 뺨이 복사꽃 같다.

얼마 안 있어 둘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코가 새까만 아이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격렬한 어조로 상대에게 뭔가 귀엣말을 했다. 나는 그의 몸을두 손으로 흔들며 외쳤다.

“뭐라는 거야? 가르쳐줘. 저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는 흠칫 놀란 듯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내 얼굴과 저쪽 아이들을 비교해보았다. 그리고 입을 우물우물 움직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의 그런 난처함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알아챘다. 아이들이 섬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날카롭게 내뱉고 모두 돌담 위로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나서 그는 이마에 한 손을 대거나 엉덩이를 긁어대면서 몹시 주저했지만 곧 입가에 심술궂은 웃음까지 머금고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언제 와봐도 똑같아, 하고 지껄였어.”

똑같다. 나는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나의 의심이 감쪽같이 적중했다. 똑같다. 이것은 비평의 말이다. 구경거리는 우리인 것이다.

“그래? 그럼 너는 거짓말을 한 거네.” 때려죽이려고 했다.

그는 내 몸에 두르고 있던 한 손에 꽉 힘을 주며 대답했다.

“가여웠으니까.”

나는 그의 넓은 가슴에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의 불쾌한 친절에 대한 분노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대한 수치심을 참을 수 없었다.

“우는 건 그만둬. 아무 소용없으니까.” 그는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저 돌담 위에 가늘고 긴 나무 팻말이 세워져 있지? 우리한테는 뒷면의 좀 더럽고 불그스름한 나뭇결만 보이지만 그 앞면에는 뭐라고 쓰여 있을까? 인간들은 그것을 읽고 있어. 귀가 빛나는 것이 일본원숭이다,라고 쓰여 있을 거야. 아니, 어쩌면 좀 더 심한 모욕이 쓰여 있는지도 모르지.”

나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팔에서 벗어나 마른나무 밑으로 뛰어갔다. 올랐다. 우듬지에 매달려 섬 전체를 바라보았다. 해는 이미 높이 올랐고 섬 여기저기에서 하얀 연무가 몽롱하게 떠올라 있었다. 백 마리나 되는 원숭이는 파란 하늘 아래서 한가하게 양지에서 햇볕을 쬐며 놀고 있었다. 나는 폭포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곳 옆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모두들 모르는 거야?”

그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아래에서 대답했다.

“어떻게 알겠어. 알고 있는 건 아마 나와 너뿐일 거야.”

“왜 도망가지 않는 거지?”

“넌 도망칠 생각이야?”

“도망칠 거야.”

푸른 잎. 자갈길. 사람들 무리.

“무섭지 않아?”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것이다.

퍼덕퍼덕 귀를 기울여, 지나는 바람소리에 섞여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눈이 뜨겁다. 아까 나를 나무에서 떨어뜨린 게 이 노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내려와! 여긴 좋은 곳이야. 볕이잘 들고 나무가 있고 물소리도 들리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먹을 것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그가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낮은 웃음소리도. 

아아. 이 유혹은 진실과 비슷하다. 어쩌면 진실인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속에서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하지만 피는, 산에서 자란 나의 바보 같은 피는 역시 집요하게 외친다.

-      싫어!

1896년 6월 중순, 런던박물관 부속 동물원 사무실로부터 일본원숭이가 도주했다는 연락이 왔다.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 두 마리였다.


그림

명쾌한 최초의 언어/막스 에른스트/노트르라인 베스트팔렌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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