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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Nov 19. 2017

상자 속의 사나이

안톤 체호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사냥꾼들이 미로노시츠코예 마을  변두리에 살고 있는 이장 프로코피네 헛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사냥꾼들이라 하지만 일행은 고작 두 사람으로 수의사 이반 이반이치와 중학교 교사 불킨이었다. 이반 이반이치는 침샤 기말라이스키라는 괴상한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성 탓에 그 고장 사람들은 이름만 불렀다. 마을 변두리에 살고 있는 그는 상쾌한 공기를 마실 요량으로 사냥에 나선 참이었다. 여름철마다 백작의 저택에 손님으로 찾아오는 중학교 교사 불킨은 이 고장에서는 꽤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키가 크고 콧수염을 길게 기른 깡마른 노인 이반 이반이치는 헛간 앞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달빛이 그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헛간 안 건초더미 위에 누우 있는 불킨은 어둠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루함을 잊을 겸, 잡담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장의 아내인 마브라를 화제에 올렸다. 그녀는 건강하고 꽤 영리한 여자였지만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 한 번도 도시와 철도를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최근 10년 동안은 늘 난로 곁을 지키고 살면서 밤에만 마을에 나간다고 했다.

"별로 놀랄 만한 얘기는 아니군요!"

불킨이 말했다.

"세상에는 꿀벌이나 달팽이처럼 자기 껍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천성을 가진 고독한 사람이 많죠. 어쩌면 그것은 사회적인 동물이 되기 전의 인류의 조상처럼 자기 동굴 속에 숨어 살려는 본능으로 돌아가려는 심리일지도 모르죠. 아니면 인간의 여러 성격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나는 자연 과학자가 아니니 그런 문제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브라와 같은 사람이 그렇게 드물지는 않겠지요.

실제로 두어 달 전에 우리 읍에서 내 동료인 그리스어 교사 베리코프라는 남자가 죽었어요. 물론, 선생님도 그에 대해서 들으셨을 겁니다. 그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 이유는 날씨가 좋든 나쁘든 우산을 펴 들고 늘 방한 외투를 입고 외출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늘 덧신을 신고 다녔고 사슴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 속에 우산이나 시계를 넣어 다녔고 연필을 깎는 칼도 넣어 다녔어요. 어떻게 보면 그의 얼굴도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졌어요. 늘 외투 깃을 세워 얼굴을 파묻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색안경을 끼고 털스웨터를 입고 귀를 솜으로 싸고 다녔죠ㅛ. 합승 마차를 타면 반드시 포장을 치게 했어요.

간단히 말해 그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상자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숨어 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현실에 대한 두려움 탓에 끊임없이 불안을 느낀 겁니다. 그가 늘 과거를 찬미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찬양한 것도 어쩌면 이러한 소심증과 현실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덧신이나 우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겠죠. 그는 자주 '오오, 그리스어는 얼마나 듣기 좋고 아름다운 말인가!'하고 황홀한 표정을 중얼거리곤 했어요. 그리곤 그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안트로포스(인간)'하고 외치곤 했답니다.

베리코프는 또 자기의 사상까지도 상자 속에 감추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늘 어떤 것을 금지하는 공고나 신문의 논설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를테면, 학생들이 9시 이후에 거리에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든가 또는 육체적인 연애를 금지하는 논설이 보이면 당연한 듯이 동조하곤 했습니다. 무엇이든 금지만 하면 만족한 거죠. 그에게는 허가, 혹은 인가라는 말이 의아스럽고 모호한 것이 숨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연극단체에 대한 허가가 내려졌거나 독서클럽이나 다방이 인가되었다고 하면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물론 좋은 일이지. 반가운 일이야. 하지만 나중에 아무 일도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런 탓에 그와 관계없는 규칙 위반이나 탈선도 그에겐 고통으로 여겨졌습니다. 동료 중 누군가가 기도회에 늦었다든가, 중학생이 나쁜 짓을 했다는 소문이 들리거나, 학급 담임인 여고사가 밤늦게 어떤 장교와 함께 나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으면 그는 몹시 흥분해서 '나중에 아무 일도 안 생겨야 할 텐데.' 하고 중얼거렸답니다. 교원 회의에서도 그는 늘 그 신중하고 의심 많은 독특한 성격과 상상으로 우리를 괴롭혔답니다. 남학교와 여학교 학생들이 난잡한 짓을 하며 교실에서 너무 떠든다면서, '당국의 귀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텐데.'하고 걱정을 늘어놓곤 했답니다. 혹은 2학년 학생 페트로프와 4학년 예고로프의 품행이 좋지 않아 제적해 버리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가 내쉬는 한숨, 우는 소리, 그 파리하고 자그마한 얼굴로 색안경을 낀 채 우리를 협박했으니, 우리는 마지못해 페트로프와 예고프의 품행점을 깎고 결국 퇴학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우리들의 집을 돌아다니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동료 교사의 집에 와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겁니다. 마치 무언가를 살피는 눈치였습니다. 그렇게 한두 시간 앉아 있다가 훌쩍 자기 집으로 가버리곤 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동료와 친해지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랍니다. 사실, 우리들 집을 찾아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그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가 일부러 방문하러 돌아다닌 것은 동료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우리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교장까지도 두려워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리 교사들은 교육을 받은, 생각이 깊고 꽤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들고 다니는 이 사내가 꼬박 15년 동안 중학교 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걸 어쩌지 못했다는 겁니다! 중하굑뿐만 아니라 읍 전체가 그랬습니다! 읍내에 사는 부인들도 토요일마다 하는 가정 연극을 그가 눈치챌까 봐 전전긍긍했고 목사들도 그가 있는 앞에서는 육식이나 카드놀이를 하는 것을 꺼리곤 했죠. 베리코프와 같은 사람의 영향을 최근 10년, 15년 동안 읍 전체가 겁을 먹고살았습니다. 말하는 것도, 편지하는 것도, 친구와 사귀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심지어는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가르치는 것ㄲ지도 걱정하게 된 셈이죠."

말을 들은 이반 이반이치는 달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무튼, 시체드린이나 투르게네프나 버클(영국의 역사가)과 같은 훌륭한 문호들의 작품을 읽은 사람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고 참았단 말이죠?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자 불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베리코프는 저와 한 집에 살았습니다. 더구나 같은 이층 맞은편 방에 살았기 때문에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생활을 알게 됐죠. 집에서도 그의 생활은 비슷했습니다 .잠오세다 실내모를 쓰고 덧문에 빗장을 질렀습니다. 그는 금지와 제한을 몸소 실천했고 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하고 걱정만 했죠. 게다가 채식만 고집했죠.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육식을 할 수가 없었겠죠. 왜냐 하면, 채식주의를 안 지킨다고 누군가 비난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채식도 아니고 육식이라도 할 수 없는 버터에 튀긴 가시고기 같은 것을 먹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나쁜 소문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녀 대신 머리가 좀 모자라는 예순 넘은 아파니시라는 주정뱅이 영감을 두었습니다. 옛날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이 영감은 경 불이나 떌 정도였습니다. 아파나시는 늘 팔짱을 끼고 문간에 섯 꺼질 듯한 한숨을 쉬면서 '요즘은 저렇게 하는 것이 유행인걸!'라고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베리코프의 침실은 상자처럼 작았고 침대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그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렇게 덥고 갑갑한 방엣 꽉 닫힌 문은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거리고 난로 속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요란했죠. 부엌에서는 늘 한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한숨소리가 거슬려서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아파나시가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도둑이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웠던 겁니다 ,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린 후 아침에 함께 출근할 때면 그의 얼굴은 늘 쓸쓸하고 창백했습니다. 그에게는 곧 만나게 될 사람으로 갇그 찬 중학교가 무서웠습니다. 모두 자기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천성이 그러니 나와 나란히 걷는 것조차 무척 괴로웠던 모양입니다.

'교실은 또 야단법석이겠죠? 정말 엉망이겠죠.'

그는 자기의 침울한 기분에 대해 변명이라도 하는 투로 그렇게 말을 꺼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상자 속에서만 사는 이 그리스어 선생이 하마터면 결혼을 할 뻔했답니다."

"농담이시겠죠!"

이반 이반이치는 헛간 쪽을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이상하게 여기실지 몰라도 실제로 결혼할 뻔했어요. 어느 날 우리 학교에 지리와 역사 선생으로 소러시아 태생의 미하일 사브비치라는 교사가 바렌카라는 누이를 데리고 부임해 왔습니다. 그는 젊고 키가 큰 데다 살색이 거무스릅하고 굉장히 큰 손을 가진 사내였죠. 얼굴 생김새만 보아도 굵은 목소리의 소유자 같아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목소리는 통 속에서 나는 듯ㅎ나 굵은 음성이었습니다. 한편, 그의 누이는 젊다고는 할 수 없는 서른을 넘긴 노처녀였습니다. 역시 키가 크고 날씬한 데다 눈썹이 짙고 볼이 붉었습니다. 무척 쾌활하고 떠들썩한 성미로 늘 소러시아의 노래를 흥얼대거나 큰소리로 웃어대곤 했습니다. 걸피샇면 경쾌한 목소리로 '하하하!' 하고 크게 웃곤 했지요.

코발렌코 남매와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교장의 생일 축하파티에서였습니다. 예의상 마지못해 참석한 무뚝뚝한 표정의 고리타분한 교육자들 틈에 불쑥 새로운 아프로디테가 거품 속에서 살아 나와 허리에 손을 대고 방 안을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감정을 한껏 불어넣어 '바람이 불다'라는 노래를 부른 뒤 잇따라 다른 노래르 불러 우리 모두를 매혹시켰습니다. 심지어 메리코프까지 얼이 빠지고 말았지요. 그는 그녀 곁에 앉아 황홀한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러시아 말은 그 우아함과 맑은 음조가 마치 고대 그리스어를 상기시켜주는군요.'

그 말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가자치스키군에 작은 농장을 갖고 있다느니, 그곳에 어머니가 계시며 배와 참외, 호박이 많다느니 하며 그에게 다정하게 말하기 시작했죠. 소러시아에서는 호박을 카바크라고 한다느니, 러시아 말의 카바크는 시노크라고 한다느니, 그곳에서는 붉은 것과 파란 것을 넣는 보르스치(수프)를 만드는데 그 맛이 정말 혀가 녹을 만큼 맛이 좋다느니, 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교장 부인도 같은 생각이었나 봅니다. 불쑥 교장 부인이 이렇게 말했거든요.

'저 두 분을 결혼시키는 게 좋겠어요.'

그제야 우리는 베리코프가 독신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때까지 그처럼 중대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여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어떤 식으로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그때깢 생각조차 못했던 겁니다. 하긴 어느 누가 좋은 날씨에도 덧신을 신고 커튼을 치고 잠자는 사내가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겠어요.

'베리코프 씨는 벌써 마흔이 넘으셨어요. 그리고 저분은 서른.....'

교장 부인은 내친김에 말을 이었습니다.

'저 처녀라면 저분에게 시집갈 것 같아요.'

시골에서는 사실 필요하지 않은 짓을 심심풀이로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 베리코프를 결혼시킬 생각으 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교장 부인과 장학관 부인을 비롯해 전 교직원의 부인들은 갑자기 인생의 목적을 찾아낸 것처럼 활기를 띠며 그 일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교장 부인이 극장 특별석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녀의 옆에는 부채를 든 바렌카가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 곁엔 몸집이 작은 베리코프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움츠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조촐한 만찬을 베풀려 하자 부인들은 베리코프와 바렌카를 초대하라고 졸랐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시동이 걸렸던 겁니다. 바렌카도 그다지 결혼에 반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동생 집에 얹혀서 살고 있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말다툼이 그칠 날이 없었으니까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죠. 키가 크고 몸집이 건강한 대장부 코발렌코가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수놓은 셔츠를 입고 앞머리를 늘어뜨린 채 차양 없는 모자를 쓴 그는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른 손엔 옹이가 여럿 박힌 지팡이를 쥐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역시 책을 든 누이가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발렌코가 갑자기 언성을 높여 비꼬듯이 말했습니다.

'얘, 미하일리크. 넌 아직도 그 책을 다 안 읽었구나!'

잡에서도 그들의 말싸움을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남동생 집이 아닌 편안한 자신만의 공간을 원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나이가 마음에 걸려도 싫고 좋고 따질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누가라도 좋다. 그리스어 선생에게라도 시집을 가겠다는 심정이었겠죠. 요즘 아가씨들은 대개 상대가 누구든 시집을 갈 수만 있으면 좋겠닥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어쨌든 바렌카는 베리코프에게 드러내 놓고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베리코프는 어땠을까요? 그는 코발렌코네 집에도 우리들 집에 오는 것처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는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잠자코 있자 바렌카는 '바람이 불다'란 노래를 들려주거나 거무스름한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다가 '하하하!'하고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무른 연애 문제, 특히 결혼에 있어서는 남의 말이 커다란 역할을 하지요. 동료나 부인들이 베리코프에게 걸핏하면 결혼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결혼 이외에 인생에서 할 일은 없다고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에게 미리 축하의 말을 하기도 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결혼이야말로 인생의 진지한 첫걸음이라는 식의 말들을 늘어놓았습니다. 게다가 바렌카는 못생긴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자가 좋아할 만하고 오등관의 딸로서 자그마한 농장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녀가 그에게 다정한 태도와 친절을 보여 준 첫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머리가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가 결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거기에 이르자 이반 이반이치가 한마디 거들었다.

"드디어 덧신과 우산을 치워 버리게 된 셈이군요."

"그것을 버릴 순 없었죠. 그는 책상 위에 바렌카의 얼굴이 담긴 액자를 장식하고는 자주 내게 와서 바렌카에 관한 얘기와 가정생활, 인생의 진지한 첫걸음에 대해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주 코발렌코네 집을 방문했습니다만, 생활양식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결혼에 대한 결심이 병적으로 작용해 더욱 바싹 마르고 얼굴빛이 창백해졌습니다. 예전보다 더 자기 상자 속에 박혀 버린 셈이었죠.

그런 중에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바르바라 사비시나를 좋아하죠. 누구나 결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일은 아시다시피 너무도 갑작스러운 얘기여서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생각하실 게 뭐 있습니까? 그냥 결혼하시면 되는 거죠.'

'아니, 결혼은 인생의 진지한 첫걸이니까 먼저 장래의 의무와 책임을 생각해야 하죠. 나중에 아무 일도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이런 걱정 때문에 나는 요새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공포를 느끼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 남내는 약간 색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뭐든 남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성격도 과격하죠. 결혼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어요.'

이래서 그는 청혼도 못하고 차일피일 날짜만 보내며 교장 부인과 우리를 몹시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장래의 의무와 책임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일 바렌카와 함께 산책을 했죠.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나한테 와서는 가정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도 결국은 청혼을 했겠지요. 그리고 심심풀이와 시간 보내기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은 결혼이 성립되었을 것입니다. 헌데 문제가 있었지요. 바렌카의 동생 코발렌코가 베리코프를 만난 첫날부터 지나칠 만큼 미워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어떻게 그런 밀고자 같은 구역질 나는 상판을 보고도 참고 견딥니까! 정말 이런 곳에서 잘도 지내십니다! 이곳 분위기는 숨이 막힐 만큼 지저분합니다. 학교는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경찰서 같습니다. 유치장처럼 쉰 냄새를 풍기고 있어요. 나는 조금만 더 여기서 지내다 시골로 갈 작정입니다. 거기서 새우도 잡고 소러시아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갈 생각입니다. 나는 곧 떠날 테니 여러분은 저 유대인과 함께 지내십시오. 차라리 그런 놈은 죽어 없어지는 게 모두를 위해 좋을 텐데....'

그런가 하면, 그는 어떤 때는 나지막한 소리로, 어떤 때는 가늘고 높은 소리로 눈물이 날만큼 웃어대며 두 팔을 벌리고 내게 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그 녀석은 우리 집에 와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거죠? 무슨 볼일이 있다는 겁니까? 그저 앉아서 사람만 쳐다보고 있단 말이에요.'

그는 베리코프에게 '욕심꾸러기 거미'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의 누이 바렌카가 이 욕심꾸러기 거미와 결혼하려 한다는 것에 대해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교장 부인이 그에게, 댁의 누님을 베리코프와 같은 믿음직하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낸다면 참 좋을 거라고 말을 하자 그는 얼궁르 찌푸리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내 알 바 아닙니다. 사부사한테 시집간다 해도 상관없어요. 나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보십시오. 어떤 장난꾸러기가 만화를 그렸습니다. 덧신을 신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우산을 받친 베리코프가 바렌카와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그림으로, 제목은 '사랑에 빠진 아트로프스'였습니다. 그 만화에는 그의 표정이 놀랄 만큼 잘 그려져  있었지요. 그 학생이 꽤 정성을 쏟아 그렸다는 얘기죠. 아무튼 그 그림은 학교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들과 서무직원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베리코프에게도 전달됐죠. 만화를 본 그는 너무도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와 나는 함께 집을 나섰는데 그날은 5월 초하루 일요일이었죠. 그날, 학교에 모인 교사와 학생들은 비구름 가득한 날씨처럼 음산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정말 세상에는 심보 나쁜 사람도 있더군요.'하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가엾게 여겨졌습니다. 아무튼 그 뒤, 학교에서 나와 길을 걷고 있는데 코발렌코가 자전가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바로 뒤엔 바렌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지친 듯했지만 그래도 쾌활하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녀는 '먼저 갈게요!'하고 소리를 치더니 '가슴이 뛸 만큼 좋은 날씨네요!'하고 외치며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금세 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베리코프의 표정은 창백하고 정신이 나간 것 같았습니다. 그는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저건 도대체 뭡니까? 혹시 내가 잘못 본 건가요? 중학교 교사가, 게다가 여자가 자전가를 타도 괜찮다는 건가요?'

나는 '왜 안 된단 말입니까?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런 말도 안 되는...'하고 놀라면서 외쳤습니다. 내가 너무 태연하게 말하니까 더 흥분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는 놀란 나머지 산책을 할 기력이 나지 않는지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다음 날, 그를 만나보니 신경질적으로 손을 비비며 와들와들 떨고 있었습니다. 표정만 봐도 기분이 무척 나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학교를 결근하고 식사도 걸렀습니다. 그리곤 저녁이 되자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옷을 껴입은 채 코발렌코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집에는 바렌카의 동생만 있었습니다.

'거기 앉으십시오.'하고 코발렌코는 쌀쌀맞게 말하면서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한숨 자다 깬 모양인지 얼굴이 부스스하고 기분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리코프는 10분 정도 잠자코 있다가 말을 꺼냈습니다.

'오늘은 제 마음을 풀어 볼까 해서 방문했습니다. 나는 몹시, 몹시 언짢은 기분입니다. 누군가가 나와 당신 누이를 익살맞은 만화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 만화의 내용은 저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두고 싶습니다. 나는 비웃음거리가 될 어떤 구실도 준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언제나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게 말하는 동안 코발렌코는 볼멘 얼굴로 잠자코 앉아 있었습니다. 베리코프는 잠시 뒤 가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나는 오랫동안 교직에 있었고 당신은 최근에 부임하셨습니다. 그러니 선배로서 한마디 주의 말씀을 드리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당신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데 그런 취미는 청소년을 교육하는데 종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코발렌코가 굵은 음성으로 반문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더 설명이 필요할까요? 미하일 사브비치, 그 이유를 모르시겠단 말입니까? 만약에 교사가 자전거를 타게 된다면 도대체 학생은 어떡하면 좋을까요? 물구나무서기라도 하고 걸을 수밖에 없겠군요. 공식적으로 아직 허가되어 있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는 어제 깜짝 놀랐습니다. 댁의 누님을 알아보았을 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부인이나 처녀가 자전거를 타다니 참으로 엄청나게 무서운 일입니다!'

'대체 어떻게 하란 말씀이오?'

'대체 어떻게 하란 말씀이오?'

'나는 다만 당신에게 주의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미하일 사브비치, 당신은 아직 젊고 장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행동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신중하지 못한 짓을 하고 계십니다. 아아, 얼마나 신중하지 못한 짓인가요! 평소에는 수놓은 셔츠를 입고 책을 들고 거리를 걷던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다니, 다신과 당신 누님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을 교장이 알게 되고 또 장학관의 귀에 들어가겠죠. 그렇게 되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코발렌코는 불끈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나와 누이가 자전거를 탔다고 해서 그게 다른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누구라도 내 사생활이나 가정생활에 간섭하는 놈은 죽어 없어져버려!'

그 말에 베리코프는 파랗게 질려서 일어섰습니다.

'그런 투로 말씀하신다면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제발 앞으로는 손윗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도록 부탁하겠습니다. 댁은 손윗사람에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코발렌코는 비웃듯 상대방을 노려보면서 반문했습니다.

'내가 손윗사람에게 욕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제발 내일에 간섭하지 마시오. 나는 결백한 사람이니까. 당신 같은 사람과는 말하고 싶지 않소. 나는 밀고자를 몹시 싫어합니다.'

흥분한 베리코프는 안절부절못하면서 공포를 느꼈는지 서둘러 외투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난폭한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현관을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한 말을 누가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까 한 말이 과장되고 왜곡돼서 소문이 나지 않도록 교장 선생님께서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요점만이라도 보고해야겠소.'

그러자 코발렌코는 '보고를 하겠다고? 좋아, 실컷 좋을 대로 지껄여보시오!'라고 소리치며 뒤에서 베리코프의 목덜미를 잡아 밀어 버렸습니다. 베리코프는 덧신에 걸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계단이 높고 가팔랐지만 다행히 베리코프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안경이 깨지지 않았는지 코에 손을 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공교롭게도 바렌카가 두 분인을 데리고 함께 들어오는 중이었습니다. 빠짐없이 사건을 지켜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베리코프에겐 무엇보다 두려웠습니다. 웃음거리가 될 바에야 차라리 목이 부러지든가 두 다리가 부러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이 이쯤 됐으니 읍 전체가 알게 될 것은 물론, 교장과 장학관의 귀에 들어갈 것이 뻔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만화에 등장하게 될 테고.... 아아, 무슨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결국 파면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 것입니다. 그가 일어섰을 때, 바렌카는 그가 자기의 애인임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그의 우스꽝스런 얼굴과 잔뜩 구겨진 외투와 덧신을 쳐다보면서 그가 실수로 넘어진 것이라고 속단하고 집안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소리로 '아하하하!'하고 웃어버렸습니다. 베리코프는 덩구 참담해져서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렌카가 건네는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책상 위에 놓인 그녀의 액자를 치우고 잠자리에 누워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흘쯤 있다가 아파시니가 찾아와서 주인의 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베리코프의 방으로 가보니 그는 커튼을 치고 이불을 덮은 채 말없이 누워 있었습니다. 무엇을 물어도 짧게 대답만 했고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선 우울한 표정의 아파시니가 걱정스레 서성거리며 깊은 한숨을 연신 내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선 보드카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결국 한 달 뒤, 베리코프는 죽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학교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에 의해 치러졌습니다. 관 속에 든 그의 표정은 조용하고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마침내 상자 속에 들어갔으니 두 번 다시 그곳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뻐하는 듯했습니다. 그렇죠, 그는 글자 그대로 자기의 이상에 도달한 셈입니다. 그런 그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듯 장례식 날은 잔뜩 하려서 비가 올 것 같아 우리들 모두는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들고 있었습니다. 바렌카도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관이 무덤 속으로 내려졌을 때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소러시아 여인에게는 웃거나 우는 것 외에 그 중간의 기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베리코프 같은 사람의 장례를 치렀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묘지에서 돌아올 때 모두들 조심스럽고 엄숙한 표정들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러한 흔쾌한 내심을 나타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표정들은 어른들이 외출한 뒤 아이들끼리 자유를 누리면서 마음껏 뛰놀 때의 표정과 똑같았습니다. 자유! 자유라는 것은 실현되기 어려운 한 가달의 희망일 뿐이라도 사람의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튼 우리는 가벼운 기분으로 묘지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생활은 예전으로 돌아갔습니다. 똑같이 고지식하고 걱정스럽고 무의미한 생활, 공식적을 금지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지도 않은 생활, 요컨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베리코프가 매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리코프처럼 상자 속에 든 사내가 많이 있으며, 앞으로도 또 나오겠죠."

말을 마치자 이반 이반이치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요,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자 불킨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겁니다!"

중학교 교사는 헛간 속에서 나왔다. 몸집이 작고 뚱뚱한 사나이로 대머리인 데다 검은 턱수염이 거의 허리께까지 닿을 지경이었다. 두 마리의 개가 그를 따라 나왔다.

"달이 좋군, 달이 좋아!" 하고 그는 하늘을 보면서 말하였다.

벌써 한밤중이었다. 오른쪽에는 마을 전체가 보이고 기다란 길이 5킬로미터가량 이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조용하고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무엇 하나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이처럼 깊은 고요가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달 밝은 밤에 오두막집과 건초더미, 잠든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신작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둠의 적먹 속에서 갖가지 고통이나 괴로움, 슬픔은 사라지고 밤의 그늘에 감싸여 왠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다. 하늘의 별들도 정 깊은 눈길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지상에는 이제 악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원만하게 수습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왼편에는 마을이 끝나는 부근에서 저 멀리 지평선까지 이어진 들판이 보였다. 달빛 가득한 넓은 들판엔 그림자 하나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자코 있던 이반 이반이치가 입을 열어 되풀이했다.

"그래요, 그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숨 막히는 좁은 동네에 살면서 필요도 없는 서류를 쓰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것, 그것도 역시 상자와 다름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게으름뱅이와 궤변가, 혹은 주책없는 여자들과 일생을 보내며 어리석은 말들을 주고받는 곳, 그것도 일종의 상자가 아닐까요.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매우 유익한 얘기를 해드릴까요?"

그러나 불킨은, "아니 이제 그만 자야겠습니다." 하고 사양했다.

그리도 두 사람은 헛간에 들어가 건초 위에 누웠다. 그런데 그들이 담요를 덮고 잠을 청하자마자 가벼운 인기척이 들려왔다. 헛간 곁으로 누군가가 지나가는 발소리였다. 발걸음 소리는 잠시 계속되는 듯하더니,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자 개들이 짖기 시작하였다.

"마브라가 돌아다니는 모양이군." 하고 불킨이 말했다.

그러자 이반 이반이치가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요. 그 거짓말을 잠자코 듣기 때문에 바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들으며 모욕과 굴욕을 참는 것도, 자기가 정직하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뚜렷이 밝히지 못하는 것도, 자기 역시 거짓말을 하고 미소를 띠는 것도, 그것들 모두 한 조각의 빵과 따듯한 집과 변변치 못한 직업을 위해 하는 것이죠. 이제는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없어요!"

그러자 불킨은 "또 얘기가 빗나갔군요." 하고 말한 뒤, "아무튼, 오늘은 그만 잡시다." 하고 덧붙였다.

10분쯤 지난 후, 불킨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반 이반이치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한숨을 쉬더니 이윽고 벌떡 일어나 문가에 앉아 파이프를 빨기 시작했다.



그림

IIya Repin, Unexpected Visitors, Tretyakov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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