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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Feb 11. 2018

1. 대학원 일기를 시작하면서

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내가 대학원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꽤 예전에 깨달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차지하고, 일단 나는 너무 한량이다. 쓰라는 논문은 쓰지도 않고 단편소설이나 쓸 궁리를 한다던가, 3시간이나 되는 오전 시간을 온전히 음악 듣는데 쓴다던가 하는 건 예삿일이다.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나는 무엇을 했나 자괴감에 빠졌다가도, 맥주 세일 간판을 보고 싱글벙글 맥주 가게로 들어가서 얼큰하게 될 때까지 마신다. 돈이 없을 때는 일주일 내내 햇반에 김치만 먹다가도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금세 한 끼에 만 삼천 원씩이나 하는 샌드위치 세트를 먹는다. 이런 사치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생활 방식은 알지 못하는 길을 조금씩 꾸준히 걸어가야 하는 연구자가 가져야 할 생활 방식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하루종일 안했다는 것을 깨달은 나의 모습이다. '어? 망했네?ㅋㅋㅋㅋㅋ'

그렇다면 나는 왜 대학원에 왔을까? 뭐, 학부 연구생을 하면서 연구직이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지만, 정신 차려 보니 이미 1년이나 대학원 생활을 한 후이다. 철없는 2~3학년 때 마음속으로 품고 있었던 연구직에 대한 로망은 연구비 관리 서류철 더미 사이로 사라졌다. 중간/기말고사 기간에는 내 공부하기에도 바쁜데 하루 종일 거지 같은 학부 조교일만 하다가 퇴근하기 일쑤다. 게다가 철마다 만들어야 할 제안서는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나는 좋은 학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직장인도 안 되는 것이다. 매일같이 때려치워야지 하는 생각은 하지만 하루하루 미룬다.

시킨 일을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연구실 포닥이 짓는 표정이다.

나는 1년째 왜 대학원에 왔는지에 대한 답변을 결국 내놓지 못했다. 그런 고민을 의식적으로 회피한 건지, 아니면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언젠가 한 친구가 왜 대학원에 진학했냐고 물었을 때, 장난으로 학부 때부터 받던 첼로 레슨을 계속 받고 싶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대답이 지금까지 내가 내놓을 수 있었던 가장 '그럴듯한' 이유이다. 아니, 첼로 때문이라고? 내 대학원이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니?

그렇게 1년 정도 대학원 생활을 하니 절망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내가 밟고 있는 디딤돌은 발을 떼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좁은 디딤돌 위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는 신비스러운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다. 

오른쪽으로 가라고 ㅄ아! 

이 대학원 일기를 엮는 이유도, 내가 처해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이다. 일기를 쓰면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알 수 있고, 왜 여기 있는지 알고 나면 어디로 갈 지도 보일 것 같다. 논리적으로는 엉망이지만 말이다. 그래, 공학도의 신이 내려주시는 계시라고 해두자. 아주 별 볼일 없는 신 일 것 같지만, 어쨌거나 계시 아닌가. 신이시여, 굽어살피소서.

신: 하...저 바보를 어떻게 할지......

올리려고 마음먹은 단편소설도 1년째 못 올리는 주제라, 진짜 일기같이 매일 쓰는 형식의 글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내가 근무하는 이 연구실은 아주 평범하다. 뭔가 글로 남길만한 인상적인 일이 밥먹듯이 일어나지 않는다. 평균적인 혜택이 있고, 평균적인 짬질이 있고, 평균적인 고통이 있는 아주 평범한 연구실인 것이다. 정규분포표의 정중앙에 분포한 그런 연구실이랄까. 그래서 엮으려는 이야기도 아주 평범한, 오히려 칼럼같이 한 주제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풀어놓는 신세한탄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래도 평균의 이야기는 평균으로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읽어줄까? 감사할 것 같다. 오히려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릴 것 같아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 내 스스로가 한량에 유약한 성격이고, 감상적이기 까지 해서 제대로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내 대학원 생활의 의미가 걸려있는 일이니, 최대한 열심히 써 볼 생각이다. 


그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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