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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Feb 28. 2018

2. 감기에 걸리다

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갑자기 지도교수가 나에게 해외 학술대회를 제안하였다. 물론 형식만 제안이었지 반 강제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할 수 있지? 지금 뭐 딱히 하는 것도 없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 당신이 준 거지 같은 일 때문에 머리털이 다 빠질 지경이라고 교수 면전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교수는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내 머릿속의 ' No'는 심약한 심장과 성대를 거쳐 'Yes'로 변했다.

그런데 알아보니 논문 완성본 제출까지 겨우 14일이나 될까 말까 한 시간만 남아있었다. 실험 계획을 세우고 결과를 도출한 다음, 논문을 쓰기엔 나에게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12월, 1월, 2월의 실험 결과는 모두 쓰레기통으로 향했었다). 행여 실험 도중 무언가 잘못되어도 재실험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Abstract을 작성하고 실험 계획을 짰다. 다음날 급하게 계획한 내용을 교수에게 보여줬더니,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그래, 괜찮네 뭐. 그냥 해봐."

분명 해외 학술을 나가자고 한 사실도 기억을 못 하는 눈치였다. 나는 살짝 열이 받았지만 일을 진행했다.

실험 자체는 순조로웠다. 사실 연구실 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은, 연구 외에 할 일들이 하루 종일 계속된다는 점이다. 진짜 나에게 필요한 연구 및 자기계발은 그런 잡무가 끝난 뒤 저녁에나 할 수 있다. 실험 후 녹초가 되어 자정 즈음에 집에 들어가면, 죽은 듯이 잠을 자고, 한 시간쯤 일찍 출근해서 어제 못다 한 실험을 했다. 이런 생활이 주말을 포함하여 1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직장인이 이런 생활을 했다면 누군가에게 푸념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대학원생은 그런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서 비극적이라 하겠다. 유난히 대학원생 삶에 관대한 것이 우리 아니겠나-.

하지만 학술대회 제출 마감일을 5일 정도 남긴 상황에서(그러니까 거의 그저께이다) 문제가 터졌다. 실험의 결과가 가정과 너무 다른 것이다. 아예 다른 종류의 실험을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진짜로 실험 결과가 나에게 'Fuck you'를 날리고 있었다. 진짜로

나는 급하게 결과를 정리해서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지도교수는 그래프 몇 개를 유심히 보더니, 나에게 실험 방법을 물었다. 나는 이 난관에서 나를 구원해 줄 기적과도 같은 인사이트를 기대하며 교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이거 원래 안 되는 건데? 왜 한 거야?"

나는 충격으로 마음속에서 주저앉았다. 띵하고 누군가 소리굽쇠를 귀 가까이에서 친 것 같았다. 만약 '진짜 안 되는 건데' 그냥 시킨 거라면 사악한 사람인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쓴 abstract과 실험 계획을 쳐다보지도 않은 것이다. 교수는 이러저러한 말을 해주고, 급하게 어디 약속이 있다면서 가버렸다.

차마 연구실로 곧장 돌아올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학교 주위를 한참 맴돌았다. 외투도 입지 않아서 몸이 으슬으슬했다. 학교 근처의 개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생각들이 플래시 터지듯 뇌에 박혔다.  미리 말해주지 않은 교수가 원망스러웠다. Abstract만 써놓은 논문이 걱정되었다. 날려버린 시간이 아까웠다. 날아간 시간에 할 수 있었을 모든 것들이 아쉬웠다. 나는 점차 작아져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되었다. 나는 조깅하는 사람들이 나를 밟을까 무서워서 길 한쪽 구석으로 비켜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몸이 너무 추웠다. 산책로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은 나같이 작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비좁았다. 나는 무언가 따듯한 걸 찾으려고 했지만, 겨우 두유 정도나 먹을 만했다. 뭐 몸을 좀 녹일 게 없나 편의점을 둘러보다가 500ml짜리 수입맥주를 집어 들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분명하지 않다. 첫 모금에는 이 추운 날씨에 차가운 맥주를 먹는 나 자신을 저주했던 것 같다. 이런 병신은 또 없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한 두 모금이 더 지나고 술기운이 돌자 몸이 따듯해졌다. 그러면서 뇌 속의 어떤 것도 같이 녹았는지, 이상한 규칙을 정했다. 눈에 보이는 편의점마다 들어가서 맥주를 사 마시자는. 나는 그 규칙에 나를 맞추기 위해 저기 멀리 편의점이 보이면 뛰면서 맥주를 마셨고, 가까이에 보이면 뒤꿈치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마셨다. 세네 캔 정도는 어디서 어떤 맥주를 마셨다 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로는 필름을 오려 붙인 것처럼 띄엄띄엄 기억난다. 다만 나는 술이 들어갈수록 점점 커져서 산책로가 내 발 한쪽에 가려질 정도가 되었다. 나는 사람들을 밟지 않기 위해 길 한쪽으로 비켜 뛰어다녔다.

교수님 방으로 올라간 후 나를 보지 못했다는 연구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꽤 늦게까지 그렇게 마신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외투는 간데없었고, 가방만 침대 옆에 버려져 있었다. 또, 심한 감기에 걸렸다.

다행히 다음날이 휴일이었고, 간호사인 동생이 수액을 놔줘서 빠르게 골골거림에서 탈출했다. 학술대회는.....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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