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물가가 주는 자유와 불편함
내가 다닐 학교는 방콕에 있었지만, 개강하기 전에 다른 지역에 가보고 싶어서 2주 일찍 입국해서 치앙마이에 먼저 갔다.
치앙마이에서의 두번째 날,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전거를 한 대 빌렸다. 일주일에 한국 돈으로 단돈 만 원.
신나게 달리다가 10분만에 자전거가 고장났다. 내려서 살펴보니 체인이 꼬여 있었다. 혼자 고쳐보려고 손으로 체인을 이리저리 당기고 만져 보았으나 손만 까만 기름 범벅이 되고 성과는 없었다.
지나가던 현지인 아저씨 아주머니가 보더니 열심히 도와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도 손만 까맣게 됐을 뿐 자전거를 고치진 못했다.
“감사해요, 감사해요. 그냥 리페어 샵에 갈게요. 감사해요….”
마침 가방에 과일 샐러드가 있어서 그들에게 내밀었지만 그들은 환한 웃음과 함께 “땡큐, 땡큐”하면서 한사코 거절했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 여기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다들 친절할까?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외국인인데다 해외 경험이 거의 없던 나는 리페어 샵에 가면 바가지를 쓸까 봐 걱정이었다. 인터넷에만 해도 해외여행 가서 현지 사정을 잘 몰라서 바가지 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난 한국에서도 자전거를 수리 받아본 적이 없어서 이런 쪽은 문외한이었다.
사람들에게 안되는 영어와 손짓 발짓으로 물어 물어 리페어 샵에 도착했다. 비싼 값을 부를까봐 계속 “하우 머치, 하우 머치”하고 물었는데, 수리비는 단 돈 20밧, 당시 환율로 한화 700원 정도였다. 잘못 들은 줄 알고 몇 번을 되물었다. 비교적 간단한 수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런 가격이! 7000원이어도 싸다고 생각했을텐데! 충격이었다.
그 시절에 올린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면 뭐가 얼마인지에 대해 그리도 많이 올렸다. 베지버거 이천 얼마, 스프링롤 천 얼마, 도미토리 1박 오천 얼마… 친구가 태국 물가 홍보대사냐고 했다.
가난하고 궁핍하게 자랐던 나에게 태국의 낮은 물가가 주는 자유는 엄청났다. 모든 게 싸다는 건, 그냥 ‘돈을 덜 쓴다’를 넘어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돈을 날리더라도, 뭔가 시도하고 실패하더라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시도를 거리낌 없이 해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시도해보고, 맛이 없으면 돈이 아깝다는 생각 없이 다른 음식을 또 시킬 수 있었다. 서비스에 값을 지불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에서 다시 구매하면 되었다. 값이 얼마 안 되니 돈을 날려도 속상하지 않았다. 숙소 값이 아깝다는 생각에 일정을 빡빡하게 채우는 대신, 원하는 만큼 여유롭게 늘어져 쉴 수 있었다.
자전거가 고장나도 700원 주고 쉽게 고칠 수 있는 그곳은 나에게는 파라다이스, 하지만 한 건에 겨우 700원 벌면서 살아가는 현지인에겐 어떨까?
처음으로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많이 보게 되었달까? 처음으로 가장 가난하지 않은 위치에 놓였다고 할까. 평생 가난했던 내가 물질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처음 서 봤을 때, 남몰래 기뻐하고 또 죄책감을 느꼈다.
해마다 수많은 외국인 여행객이 태국에 몰려든다. 현지인은 여행객을 위해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 여행객은 현지인을 위해 현지어를 잘 배우지 않는다. 한국인 여행객의 발을 마사지해 생계를 꾸리는 현지인은 한국에 비행기 타고 놀러 와서 발 마사지를 받을 형편이 안 된다.
식당에 가면 현지인은 서빙하고 손님은 제 1세계 사람뿐인 풍경을 자주 보았다. 무언의 계급이 나뉘어진 것처럼 조금 기이하게 느껴졌다.
가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서양인 배낭여행자들을 보았다. “제가 여행할 수 있게 돈을 보태주세요” 같은 내용의 팻말과 함께 건장한 몸을 가진 백인들이 구걸하고 있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낯부끄러웠다. 그들에게는 잠깐의 이색 경험으로 그칠 이곳이 현지인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왜 모른 체 할까.
한국보다 물가가 비싼 서유럽이나 호주에서 나는 꽤 구질구질해졌다. 싸고 창문도 없고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한 방을 공유하는 열악한 숙소에서 지내고, 밥값을 아끼기 위해 식당에서 마감 때 떨이로 내놓는 음식을 사 먹거나 빵쪼가리를 먹으며 지냈다. 그래도 현지인을 보면서 어쩔 줄 모르는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았다. 태국과는 다르게 식당에 현지인과 관광객이 섞여 있었다. 서빙하는 사람들도 인종과 국적과 억양이 다양했다. 그곳에선 상대적으로 가난했지만 마음은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