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짓기 금지

처음 가 본 도미토리에서 깜짝 놀라 도망친 이야기

by 나해

원래는 치앙마이에서만 2주를 보내고 학기 시작을 위해 방콕에 갈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심심해서 다른 지역에 가보고 싶어졌다. 마을 길거리에 즐비한 여행사의 안내 책자를 살펴보다가 빠이라는 마을에 관심이 갔다. 치앙마이에서 3-4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되는 거리였고, 치앙마이와 빠이를 왔다 갔다 하는 미니 버스가 자주 다니고 있었다.


IMG_20180719_124226.jpg 치앙마이에서 지내던 에어비앤비 숙소


치앙마이에서 지내던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현지인 호스트의 집이었다. 호스트의 2층집 중 1층, 입구가 따로 있고 방 하나에 화장실 하나가 딸려있는 공간에서 지냈다. 조금 허름하지만 진짜 현지 느낌이라 좋았다. 호스트는 어린 딸을 키우는 30대 여성으로, 항상 미소를 짓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가 여성 게스트만 받고 있어서, 집에는 나와 다른 여성 게스트 한 명까지 모두 여성밖에 없었다. 키가 크고 푸른 열대 식물들이 많은 나무집의 분위기까지 더해져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이 숙소의 단점은, 옆집에 키우는 닭 여러 마리가 새벽 네시부터 우렁차게 울어댄다는 점이었다.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닭들도 돌림노래를 부르듯 울기 시작했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커서 잠을 깊게 자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다행히 남은 일주일의 예약 기간에 대해 위약금을 제외한 금액을 환불받을 수 있었다. 2주를 다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지만 환불이 가능하다 하니 겸사겸사 빠이에서 남은 일주일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지각을 일삼던 그 시절의 나는 빠이 가는 날에도 늦어서 버스를 못 탈 뻔했다.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미리 예약해 놓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싸고 나니 시간이 빠듯했다. 헐레벌떡 자전거를 반납하고 체크아웃을 한 후 무엇을 먹을 틈도 없이 서둘러 겨우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하필 비가 와서 가방과 옷이 조금 젖었다.


미니 버스는 열 명 남짓한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밴이었다. 승객은 대부분 배낭을 멘 젊은 백인이었다.


산속에 위치한 마을 빠이는 치앙마이에서 구불구불한 산길 140km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그 길의 커브는 762개나 된다고 알려져 있다. 평소에도 멀미를 잘 하는 나인데, 아무것도 못 먹은 상태라 더 멀미가 심했다. 승객 대부분이 멀미에 시달리는 듯 보였다. 한 백인 여성은 중간에 차를 세워달라고 한 후 뛰쳐나가 도로 옆에 토했다.


두 시간쯤 달리다가 버스가 작고 허름한 가게 앞에 멈춰섰다. 휴게소 역할을 하는 가게인 듯했다. 가게는 음료와 간식, 끼니가 될 만한 음식 등을 판매하고 있었고, 음식을 먹거나 쉴 수 있는 테이블 몇 개와 돈을 내고 이용하는 화장실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멀미약을 사서 먹었다.




빠이에 도착해서 보니 치앙마이보다 훨씬 건물들의 키가 작고 단란한 분위기였다. 산속이라 그런지 공기가 신선했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평화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길거리 여행객의 대부분이 백인이었다. 웃통을 벗은 남자들도 간간히 보였다.


일단 캐리어를 끌고 예약해 둔 호스텔로 걸어갔다. 내가 예약한 방은 4인실 도미토리였다. 낯선 사람과 방을 함께 쓰게 되는 거였는데, 생애 처음 시도해보는 일이었다. 나보다 일 년 먼저 태국을 여행했던 친구 A는 이렇게 말했다.


"도미토리에 가! 거기 가면 잘생긴 서양 남자가 많아. 웃통 벗은 섹시한 남자도 많이 볼 수 있어. 친구도 사귈 수 있고. 가격도 훨씬 싸고."


"헉, 다른 사람들이랑 같은 방을 쓰면, 프라이버시는 어떡해?"


"침대마다 커튼이 있는 호스텔이 있어. 그런 곳을 찾으면 돼."


그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 도미토리에 가게 된 거였다.


호스텔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했다. 직원은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고 무표정한 남자였다.


"4인실 3박 예약한 거 맞지?"


"Okay."


영어로 말해본 적도 별로 없고 처음 와 본 호스텔의 분위기도 낯설었던 데다 직원이 무뚝뚝하기까지 하니 나는 얼어서 그렇게 대답했다. 'Okay'는 '알겠다'는 뜻이니 이 맥락에 맞는 대답은 아니었다. 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맞아?"


"Okay, 아, yes, yes...."


직원은 갸우뚱하며 마저 안내를 해주었다. 내가 묵게 될 방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두웠다. 방 벽에 붙은 표지판을 본 나는 충격받았다.


IMG_20180725_222536_HHT (1).jpg


'뭐? 섹스 금지라니, 그럼 섹스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 말이야? 남들과 공유하는 이런 방에서?'


하필 그 표지판이 건조하게 '섹스 금지'라고 써놓은 게 아니라 소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는 원초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는 바람에 어린 나의 충격은 배가 되었다.


'나, 여기 있어도 되는 게 맞나?'




그때까지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가 고팠던 나는 일단 비건 식당을 검색했다. 걸어서 15분쯤이면 가로지를 만한 그 작은 마을 중심지에도 비건 식당이 네다섯개나 있었다. 그 중 한 곳에 찾아갔다. 백인 손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고 있었다. 열린 문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신발을 벗어야 할까?'


문 앞에는 신발 몇 켤레가 놓여 있었는데, 식당 안의 손님들은 대부분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직원이 나를 볼 때까지 기웃거리고 있었다. 멀찍이서 나를 발견한 직원은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신발을 가리키며 질문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신발을 벗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머릿속에서 영작할 수는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어로 유창하게 이야기 중인 많은 손님들 앞에서 나의 부족한 영어를 큰 소리로 외치려니 너무 부끄러웠다. 직원은 내 무언의 질문을 이해했는지 하지 못했는지 그냥 들어오라고만 했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 쭈뼛쭈뼛 식당에 들어갔다. 혼자 휴대폰을 보면서 밥을 먹었다. 빠이의 모든 게 낯설었다....


겨우 치앙마이에 익숙해지던 차였는데, 참 재밌었는데.... 처음에는 낯설었던 치앙마이가 이제는 그리웠다. 다시 치앙마이를 갈까?


밥을 먹고 호스텔에 돌아왔다. 방에 어떤 남자 투숙객이 있었다. 문신이 많고 검은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며 상의를 입지 않은 남자였다. 와, 진짜로 낯선 남자가 있네... 같은 방에... 반나체로.... 알고 온 거긴 하지만, 좀 무서웠다. 그때는 그렇게 가까이서 모르는 성인 남자의 벗은 상체를 본 게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얼른 침대에 들어가서 커튼을 치고 숨었다. 곧 남자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긴장한 상태로 침대에 웅크려 누웠다. 멀미약 때문인지 잠이 쏟아졌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저녁 아홉 시 반이었다.

이전 04화700원 주고 고친 자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