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울렁증 인간이 외국에서 친구 사귄 이야기
아침이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으면 나무 바닥에 발이 닿는 느낌이 좋았다. 나무 냄새, 간밤에 내린 비로 축축해진 흙과 풀의 냄새.
사코와 나는 4인실 방을 함께 썼다. 위층 침대의 사람이 몇 번씩 바뀌는 동안 우리는 1층 침대를 일주일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세차게 비가 오다가 그치다가를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날씨 속, 우리는 우비를 입고 축축한 발로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사코는 영어를 잘 못해도 친구를 잘 사귀었다. 여기저기서 알게 된 사람들과 공연을 일주일에 한두번씩 하곤 했다. 나는 그게 신기하고 멋지게 느껴졌다.
호스텔에는 나와 사코 말고도 수많은 게스트들이 오고 또 떠났다. 대부분은 이틀 정도 머무르면서 아침 일찍부터 꽉 찬 일정을 소화하고 급히 다른 곳으로 떠났다. 제프는 나와 사코처럼 그 곳에 오래 머무른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머리를 빡빡 깎은 파란 눈의 백인 미국인으로, 우쿨렐레를 들고 다니며 2년째 세계여행 중이라고 했다.
“2년이라니! 신기하다. 경비는 어떻게 충당해?”
내가 물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영어강사를 하며 돈을 모아. 그러다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지면 훌쩍 떠나지.”
“특권 짱이다. 제1세계 영어권 출신 백인 특권 짱. 부럽다.”
그는 맞는 말이라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코를 만난 제프는 사코가 그 무거운 키보드와 앰프를 들고 다니며 여행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내가 우쿨렐레를 들고 다니는 이유 중 하나는 가벼워서거든."
제프가 합주를 제안하여 둘은 호스텔 마루에 앉아 즉석 공연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였다. 바깥에는 싱그러운 풀들 위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와 흙, 풀 냄새가 음악과 잘 어우러졌다. 악기가 없는 나는 그저 그들의 공연을 휴대폰 카메라로 담으며 감탄만 했다.
제프에게는 여행 중에 만난 포르투갈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패트리샤였고 근처의 다른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코가 그날 밤에 있을 공연 리허설을 하러 간 어느 날, 그들은 자기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갈 건데 나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대답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
나는 여럿이서 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자리를 두려워했다. 제프를 만나기 전, 영국인과 프랑스인으로 이루어진 네 명의 무리가 나에게 밥을 같이 먹자고 해서 따라간 적이 있었다. 식당에서 나는 그들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일대일 대화라면 상대방이 내게 맞춰 천천히 이야기해서 알아듣기가 비교적 수월하지만, 여럿이서 대화를 하다보면 사람들의 말이 빨라지기도 하고 내가 매번 못 알아들었다며 무슨 말인지 되묻기도 어려웠다. 그들이 평온하게 대화하는 동안 내 얼굴엔 점점 부끄러움과 당혹감이 차올랐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밥을 다 먹고 나오는 길에 나는 그 무리 중 한 명인 영국인 여성에게 소심하게 말했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거의 못 알아듣겠더라고. 그래서 말을 별로 안 했어."
"그렇구나. 괜찮아!"
그 후에도 그는 한번 더 같은 제안을 했지만 나는 이미 밥을 먹었다고 하며 피했다. 그렇게 그들과는 더이상 교류하지 않게 되었다.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 반,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차라리 혼자 있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내 말을 들은 패트리샤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답했다.
"그건 전혀 상관 없어! 영어를 꼭 잘하지 않아도 돼."
제프도 거들었다.
"아까 나랑 얘기할 땐 잘하던 걸."
그 말에 용기를 얻어 그들을 따라갔다. 그 저녁식사에는 나를 포함해 6명이 있었다. 제프와 둘이 대화할 땐 제프가 천천히 말해서 그런지 거의 다 알아들었는데, 역시나 여럿이서 하는 대화에선 사람들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말없이 눈치를 보며 사람들이 웃을 때 적당히 따라 웃고 있었는데 패트리샤가 간간히 내게 말을 걸어주며 나를 대화에 끼워주려고 노력했다.
"너희 나라는 어때?"
내가 영어로 말을 하다가 중간에 말이 막혀서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그는 말했다.
"괜찮아. 너 잘 하고 있어."
제프도 거들었다.
"우린 시간 많아! 천천히 얘기해도 돼."
한 번은 패트리샤가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데, 그는 나에게 되물으면서 빠르게 덧붙였다.
"스쿠터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나는 그들의 사려 깊음에 감격했다.
저녁을 먹고 그들이 재즈바에 가자고 하길래 따라갔다. 걸어가는 길에도 그들의 대화를 거의 못 알아들어서 그냥 가지말까 좀 고민했는데, 나중엔 가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재즈바에서 정말 재밌게 놀았기 때문이다.
재즈바에서 술을 홀짝이며 제프가 제안한 게임을 했다. 게임의 규칙은 이랬다.
1. 각자 종이에 무언가를 묘사하는 문장을 쓴다.
2. 옆사람에게 그 종이를 넘긴다.
3. 각자 받은 종이에 그 묘사에 해당하는 그림을 그린 후 다음 사람에게 종이를 넘긴다.
4. 처음 문장을 가린 상태에서 다음 사람이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을 쓴다.
5. 처음 그림과 설명을 가린 상태에서 다음 사람이 두 번째 설명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6. 결과물을 다같이 확인한다.
결과물을 보고 설명과 그림이 왜곡되어 가는 과정이 웃겨서 한참을 깔깔거렸다. 담배가 똥이, 공룡의 다리 두 개가 혀가, 달이 쿠키가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저스틴 비버는 그대로 저스틴 비버였다.
"그냥 노래하는 사람 그림인데 저스틴 비버인 줄 어떻게 맞춘 거지!"
"패트리샤가 저스틴 비버 팬이라서 그래."
재즈바는 마당에 작은 야외 무대가 있고 평상 몇 개, 평상 위에 테이블 하나씩이 올려져 있는 공간이었다. 모히또를 홀짝이면서 현지인과 배낭여행자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사코도 다른 여행자와 함께 무대 하나를 했다.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뺨에 와닿는 밤바람이 선선했다.
공연을 했던 현지인 남자 두 명이 우리 테이블에 와서 말을 걸었다. 그런 일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한 명은 머리가 길고 수염이 덥수룩했고 한 명은 대머리에 통통했다. 공연 잘 봤다, 빠이는 어떻냐 등의 이야기를 즐겁게 나눴다. 호쾌한 그들은 빠이 주변의 자연을 구경시켜주겠다고 가이드를 자청했다. 우리는 잘됐다고 기뻐하며 다음 날 만날 약속을 잡았다.
우리 모두는 다음 날 오전에 만나 폭포와 절벽을 보러 갔다. 오토바이를 탈 줄 모르는 나는 제프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탔다.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에는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들은 아예 숙소에서 나올 때부터 수영복 하의만 입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이 바로 오토바이에 탑승했다. 간편해 보여서 부러웠다.
폭포 자체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돌아올 때의 장면은 생생히 기억난다. 비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거세졌다. 오토바이를 타고 비를 맞으면 빗방울이 따발총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비를 후드려맞는 얼굴이 엄청나게 따가웠다. 비닐로 된 우비의 후드가 바람에 벗겨지고, 비닐 우비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모터 소리는 더 시끄러웠다. 제프가 흥이 나서 소리쳤다.
“예에에에에에에이!”
나는 너무 웃기고 재밌어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활짝 웃는 입 안으로도 빗방울이 들이쳤다.
비 오는 걸 그렇게 싫어했던 나인데, 빠이에서는 비가 와도 하나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날이 좋아서 계획했던 일정이 비 때문에 어그러지고, 신발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고, 달리는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얼굴에 따가운 빗발을 흠뻑 맞아도 재밌기만 했다.
빠이에는 실내외 구분이 없는 식당이나 카페들이 많았다. 밀폐되어 있지 않으니 당연히 에어컨도 틀지 않았다. 인위적인 에어컨 바람 대신 선선하고 기분 좋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마시던 과일 스무디. 신선한 과일을 듬뿍 갈아넣은 스무디나 주스를 2천원 정도에 마실 수 있었다. 달고 짜고 기름져서 맛있었던 현지 음식은 한 끼에 4천원 정도면 먹을 수 있었다. 머물던 호스텔은 1박에 6천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밤마다 내일은 또 뭘 먹을까 기대하며 잠들곤 했다. 낯선 사람들 넷과 함께 자는 도미토리의 이층 침대가 어떻게 그렇게 편했을까. 머나먼 나라, 두 달 전까진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마을이 어떻게 그렇게 내 집 같았을까. 나는 빠이를 사랑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찜찜함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