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지금 가자

나무 관세음보살

by 수헌 한옥자

같은 말을 반복하면 가치에 변화가 생긴다. 지식 전달이 목적이라면 교육의 효과를 보겠으나 자기의 입장을 설명하는 같은 말의 반복은 변명으로 들린다. 딴에는 상대를 설득한다고 한말을 하고 또 하는 것이지만 그럴수록 듣는 이는 의혹의 싹이 자라게 마련이다. 남을 속이려는 사람을 유심히 보면 허점이 많다.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 눈빛과 과대한 몸짓이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라고 표시를 낸다.

루앙프르방을 가기 위해 쏭 강 근처의 여행사에서 사설 미니밴 버스를 예약했었다. 차의 종류마다 요금이 다른데 안전과 안락을 위해 가장 비싼 요금인 일본 도요다사의 미니버스를 선택했다.

아침 일찍 배낭을 꾸려 로비에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호텔 직원에게 버스 예약 영수증을 보여주며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난 후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트럭 한 대가 나타났다.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은 전날 여행사에서 본 얼굴이다.

그는 크고 조급한 목소리로 서둘며 거칠게 차를 몰았다. 몸이 마구 흔들려 한 손은 차 안의 손잡이를 꽉 잡고 다른 한 손은 아들의 팔을 잡았다. 여행사 앞으로 우리를 데리고 오더니 다시 송 테우로 바꾸어 타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약속을 어긴 그가 오히려 당당했다. 유럽 아가씨 2명과 함께 또 얼마를 가니 방비엥 버스터미널이다.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차는 예약했던 차가 아니고 35만 Km나 주행한 한국산 중고 스타렉스 차였다.

라오스의 거리에는 일본산과 한국산 중고차가 많다. 특히 우리나라의 미니버스가 자주 눈에 띄었다. 중고차를 동남아로 수출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 차를 타야 하는 상황이 처음으로 벌어졌다. 이것이 해외여행 중에 겪는 애환이구나,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함께 갈 독일 아가씨도 얼굴을 붉히며 차량 기사에게 마구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셈 셈 부띠끄'라고 저 혼자 시키지도 않는 말을 반복하더니 최고 비싼 요금을 받고 최하의 차를 타라는 것이다. 우리가 묵던 호텔은 '방비엥 부띠끄 호텔'이고 리버사이드 부띠끄'란 명칭의 호텔도 있었다. 그래서 셈 셈이란다. 이름이 같아 헤맸다고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의 언구럭스러운 태도는 우리를 속였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한국 청년 2명과 독일 아가씨 2명, 그리고 국적 모를 청년 둘과 아들과 나, 기사를 포함한 현지민 2명, 도합 11명은 그렇게 300킬로나 가야 하는 루앙프라방을 향했다. 인내가 많이 필요했던 아침이었다. 그런데 사설 여행자의 교통수단은 여행자만 태우지는 않았다. 얼마간 가다가 마을에 들러 현지인을 태우고, 가다가 또 태워 빈자리 하나 없이 좌석을 꽉 채우고 나서야 멈추지 않았다. 달린다고 달려봐야 속도는 마냥 느렸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여행사를 상대로 언쟁을 하던 아들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고 차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유럽 아가씨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탄 차 안이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각자 분을 삭이고 있었는데 그들의 감정이 얼굴에 담뿍 담겼다.

남미 여행 중에도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단다. 걸핏하면 속이고, 소매치기는 들끓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을 정도의 위험을 거듭하면서 인간에 대한 경계와 배신감이 켜켜로 쌓였다고 했다. 객지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얻은 귀한 경험이길 바라지만 어미 된 자는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아는 내 자식은 순한 양의 모습이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뜻을 세운 일은 기어이 해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스스로 알아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무던히 기도했다. 알아서 산다는 것은 온갖 경험을 통해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훗날 아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알아서 하라는 말씀이 더 무서웠어요. 차라리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해주시지요!”

안전벨트를 꼭꼭 여몄지만 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라 걸핏하면 언덕길이다. 길을 가다가 시동이 꺼지자 운전기사는 승객 중 한 사람을 내리라고 하더니 타이어에 돌을 괴라 한다. 그 행동이 얼마나 천연덕스러운지 감당하기가 어렵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곧 차가 폭발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올라온 길의 뒤를 돌아다보니 저 아래가 아득했다. 차 안에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으나 가슴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고 얼굴빛이 말을 해주고 있다.

겨우 언덕을 올라왔다. 운전자는 시동을 끄고 엔진 위에 물을 끼얹었다. 물을 적신 누더기 천을 올려놓고 천연덕스럽게 차 주위를 맴돌며 지친 차의 노고를 달래고 있었다. 내려갈 일이 까마득한 산 정상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득한 만큼 심호흡을 했다. 화장실은 2,000 낍(280원)의 요금을 받았으나 청량한 바람과 맑은 공기는 공짜라 마음껏 마실 수가 있었다.

열두 명을 태우고 오느라 버거웠던 고물차가 다시 움직였다. 내리막길이 더 불안했다. 만약 낭떠러지로 구르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고 나면 다음 수순은 내리막. 걸어서는 가지 못하니 다시 차를 타는 방법밖에 없었다. 산바람에 실려 오는 공기가 등을 토닥였다. 폐부를 거친 공기 덕분에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된다.

라오스는 불교국가이다. 차에 오르자마자 안전벨트를 꽁꽁 여미다가 불쑥 큰소리로 말이 나왔다.

"다들 안전 도착을 위해 기도합시다. 나무 관세음보살"

마냥 불안한 채 떨기보다는 차에 남은 마지막 성능을 믿고, 운전기사의 정비 실력을 믿고, 너와 나를 믿고, 모두를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설령 또 속을지라도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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