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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Jul 21. 2021

내 말을 받아주지 않아 감사하다

최근에 어느 지인을 향해 쌓였던 감정이 폭발한 적이 있었다.

내가 분명히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자기주장을 멈추지 않고 같은 말을 열 번은 반복했다.

분명 닥친 문제에 대해 내가 이미 결정을 내렸고 내가 생각하는 길이 있던 부분이었는데, 날 위해서 해주는 건 말이라는 명목 하에 지인은 계속 선을 넘었다.

마치 그의 선택을 따르지 않는 내가 답답하고 뭘 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


장장 삼 개월에 걸쳐 그 지인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온갖 회유책을 써보았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고 그 와중에 그가 조언해주었던 문제는 자꾸만 악화되는 것 같자 그 지인은 더더욱 기고만장한 어투로 내게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때 나는 터져버렸고, 있는 힘껏 그가 선을 넘었다고 티를 냈다.

감정이 한순간 솟구쳐 이성을 눌러버렸다.

그리고 속상한 마음을 안고 혼자 화를 삭이는데 때마침 친한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 문제를 어렴풋이 알고 있던 친구기에 나는 친구에게 구구절절 모든 걸 털어놓았다.

지인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내 주장을 무시하듯 굴었는지, 내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도 그가 얼마나 눈치 없게 굴었는지.

감정이 가라앉기 전, 한창 요동을 치던 때 난 모든 걸 쏟아놓았다.


그때 돌아온 건 친구의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 나는 더 힘든 문제를 갖고 있다는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하던 친구는 내 말을 자르고 본인이 힘든 부분만 털어놓고 대화는 끝이 났다.

대화가 끝나고 보니 속상한 마음에 서운함이 더해졌다.


난 친구가 힘들 때 그에게 어떻게 하면 힘을 북돋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위로해 주었었는데.

그런 고민상담을 못해도 여태 열 번은 해주고 내 힘듬을 겨우 한번 털어놓은 것 같은데, 고작 이런 반응이라니.


지인으로부터 비롯된 분노에 서운함까지 폭발하며 내가 인간관계 자체를 실패한듯한 기분에 잠겼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다음날이 되고 모든 감정이 한결 정리되었을 때 돌아보니, 그런 친구의 반응에 고마웠다.

공감 못해준 친구에게 여전히 섭섭함은 조금 남아있지만, 친구가 이야기를 끊어준 덕에 내 입술과 생각이 부정적인 감정에 덜 잠식될 수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친구에게 나누고 공감을 받았더라면 나는 지인에 관한 옛날이야기까지 모두 꺼내 친구에게 쏟아부었을 것이다.

친구가 내 말에 맞장구라도 쳤다면 난 더더욱 지인이 틀렸다는 생각에만 틀어박혔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던진 부정적인 말들에 무의식 중에 영향을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확 솟구쳤던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자, 지인의 의견을 한번 더 검토해보게 됐고 난 이성적으로 내 방법을 택하고 그 선택에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친구 덕에 내 입과 생각이 부정적인 감정과 말로부터 지켜졌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기대어 상황을 해결한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모든 감정과 생각을 처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단기적으로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감정 쓰레기통을 찾기 이전에 나 스스로 그 감정을 소화해 낼 수 있었다.

입술에서 떠난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데, 감정적으로 폭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내뱉고 후회할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도 인간이기에 내 친구를 향한 섭섭한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이것도 차차 소화될 감정이다.

그리고 좋은 것만 이야기하고 듣기에 모자란 시간이기에 앞으로 나도 친구에게 좋은 말을 하고 좋은 말을 듣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그리고 반대로 안 그래도 살기 벅찬 세상에서 남의 고민을 매번 대신 끌어안아주는 감정 쓰레기통이 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대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무작정 누군가의 순간적인 감정들을 매번 대신 끌어안아주고 대신 처리해주는 게 때로는 상대의 성장을 막는 행위라는 걸 이번 기회를 통해 새겨보려 한다.

그가 스스로 모든 걸 겪고 소화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뺏지 않기로.

그리고 나도 그 기회를 뺏기지 않기로.

앞으로 내 생각과 입술에는 더욱더 예쁜 것 좋은 것만 담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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