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랑끗 May 24. 2022

공감과 연민의 차이점

최근에 크리스텔 프티콜랭이 쓴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됐다.

그 책에는 생각이 많고 예민한 사람이 심리 조종가 (악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이) 들에게 얼마나 쉬운 먹잇감인지 설명이 나와있었다.


저자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을 특히나 연민의 감정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삶을 살아오며 연민이라는 감정이 그다지 나쁜 축에 속하지는 않는다 믿었기에 나는 이런 모습을 싫어하지도, 사랑하지도 았지만 그래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자는 공감보다 넘어선 연민의 감정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심리 조종가의 먹잇감이 되기 쉽게 만든다고 했다.


공감은 모두의 인생에 힘듦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상대에게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힘이 있다는 걸 믿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선을 지키고 상대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느 정도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선을 지킬 줄 안다고 쓰여있었다.


하지만 연민의 감정은 쉽게 설명하자면 ‘구원자 콤플렉스’와 꽤 닮아있다.

상대의 어려움이 너무 커서 그가 이겨낼 수 없으리라 전제를 두고 그를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하려고 애를 쓰는 것.

내가 그의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했다.


글을 읽고 찬찬히 생각해보니 나는 연민의 감정을 가지지 않으면 무정한 것이라고 믿으며 여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래서 선을 넘고, 내가 벅찰 정도로 상대에게 베풀고 잘해주고, 또 부담을 느끼는 상대의 거절에 상처받고는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선한 의도의 나를 몰라주는 상대가 원망스러웠었는데, 나는 그저 이미 힘들 대로 힘든 그가 그어놓은 선을 넘었을 뿐이었다.


동시에 그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기도 했었다.

그가 필요했던 건 그를 믿어주는 것이었을 수도 있는데.

어쩌면 나는 힘든 그의 마음 사정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선한 내 모습에 도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족한 내 자존감을 다른 의미로 채우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내 말을 따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내심 희열을 느꼈다.

나를 의지할수록 그들의 삶에 번져가는 내 영향력을 보며.

사실 연만은 그들을 위했던 게 아니라, 나를 위했던 거다.

어쩌면 내가 연민을 쏟음으로써 무의식 중에 선한 가면을 쓴 한 명의 심리 조종가가 되려 했을는지도.


앞으로는 연민을 멈추고 공감의 감정을 키워야겠다.

내가 우월한 곳에 서서 누군가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착각을 멈추고.

그의 힘듦을 인정해주면서도, 그의 힘듦을 내가 대신 책임져주지 않아도 됨을 기억하고.

또 그에게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믿어주며 그저 곁에서 묵묵히 걷는 한 사람이 되기를.


작가의 이전글 당신을 주목했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