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연애 프로 출연자가 “근거 없는 수치심”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이게 바로 내 인생의 가장 큰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감정의 이름이구나,라는 자각이 되어서였다.
어렸을 적에는 해맑고 당당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강한 수치심 속에서 살고는 했다.
원래는 사회적 방패를 만들어 그 수치심을 가리며 살아왔다.
성적, 뭐든 잘 해내는 능력을 통해 얻은 가짜 우월감, 하다못해 게임 실력 같은 사소한 것으로.
이 수치심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가 나의 끝질문이 되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 감정을 파고들고 파고들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지만, 가족들의 시선이었다.
특히나 엄마는 나와 성향이 지독할 정도로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회에서 만났다면 피했을 만큼.
그리고 엄마가 지나가며 툭툭 던지는 말을 들어보면, 엄마는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을 굉장히 싫어했다.
엄마는 늘 내 앞에서나, 형제들에게나, 아빠에게 내가 한심하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뉘앙스를 늘 풍겼다.
늦둥이 셋째의 탄생과 이민 오게 되었던 시기가 맞물려, 엄마가 힘들다는 이유로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방치당했다.
물론 밥은 굶지 않았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부모님이 채워준 건 거의 없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차라리 고아가 나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
따스한 말이나 인정은 없었다. 늘 나는 엄마에게 성가시고 이해되지 않는 가시와 같은 존재 같았다.
어쩌면 엄마는 내게 본인의 힘듦을 쏟아놓았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같은 성향의 오빠는 본인과 다른 내 성격을 늘 비아냥거리고 내가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내 성격이 이모양이니 다른 사람들이 날 싫어한다며 웃음거리로 만들고는 했다.
상담을 받는다는 나에게 가족들은 참 유별나고 약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다 그러고 사는데, 너만 왜 그러냐가 돌아오는 대답이었다.
그래, 모두가 힘든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왜 모두들 내가 힘든 건 사소하다며 인정해주지 않는거야?
왜 내가 당신의 삶이 힘들다고만 해줘야하나.
우울증과 싸우고 있던 날,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나는 늘 사람들 앞에서 나를 숨기는 법을 배웠다.
진짜 나를 드러내면 가족들과 같은 취급을 할 거라는 생각에 나는 늘 나를 감추고 착한 사람이 되었다.
착하지 않고, 작은 실수라도 하면 나를 숨 막힐 정도로 차오르는 수치심과 나는 자주 싸워냈다.
사람들이 날 업신여기고 한심하게 여길 거라는 생각이 기본값이다 보니, 사람들 앞에서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지고 방어적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게 어려웠다.
그리고 미움받는 상황이 너무 두려웠다.
그러면 모두에게 미움받는 것만 같아서.
남편은 이 이야기를 듣더니, 가족들의 그 말과 시선이 참 잘못됐고 내 안에는 많은 빛나는 점이 많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사랑 가득한 이야기가 너무 따스하고 듣기에 눈물이 나면서도,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수치심을 단번에 뽑아내지는 못했다.
큰 비약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출연자도 가족에게 이런 식으로 외면받고 수용받은 경험이 없었기에 그랬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어딘가 특이하고, 모나고, 못난 나의 모습이 당신들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외치기에는 나는 너무 나이 들었고, 애초에 이 외침에 또 덧붙여질 비아냥에 내 속은 또 한 번 썩어 들어간다.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한심하게 보이는 모습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아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두렵게 만든 건 당신들이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도 꾹꾹 삼킨다.
고래고래 악을 써봤자 나를 더 아프게 찌를 말들이 내게 돌아올 거니까.
나, 내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일평생 내게 비판과 방임을 선물해 주었던 가족과 거리를 두었더니, 친정 가족들은 가족들한테도 못하니 사회생활이나 잘할 수 있겠냐더라.
웃음이 났다.
만에 하나 이 글을 읽으며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당신의 수치심이 비롯된 근원을 잘 찾아서 그것에서부터 멀어지기를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내 유전자에 새겨져 버린 듯한 수치심을 빠르게, 완전히 뿌리 뽑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희미해지기는 하더라.
수치심이 인생 디폴트인 모습에서 언젠가 자연스럽고 솔직한 나를 수용하고 당당하게 사는 날이 올까.
앞으로도 매일 밀려오는 수치심 속에서 발버둥 쳐봐야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