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에 관하여

by 랑끗

이번 폭풍을 겪고 보니, 내가 누군가와 맺고 있는 관계가 불건강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증상 중 하나는 내가 상대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상대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이더라.


관계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통제권이 어느 순간부터 모두 상대에게 쥐어져 있어서, 내가 그 사람의 표정이나 반응에 쩔쩔매고 있다면 과연 이 관계가 건강한 지부터 살펴보자.

또, 대화 속에서 나의 힘듬은 축소되고 상대의 힘듬만 강조되는 대화라면 그것도 한번 살펴보자.

어느새 상대 앞에서 내가 너무 작아져있다면, 그것도 한번.


개구리가 차가운 물이 담긴 냄비에 담가진 채로 서서히 달궈지면 모르듯이, 처음에는 간을 보듯이 조금씩 나오던 하대가 점차적으로 늘어 어느새 나는 당연히 하대하는 사람이 되어있더라.

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상대에게 정중히 부탁을 하거나, 내가 견디다 못해 반격을 하면 상대는 화려한 언변으로 이 관계에 악영향을 준건 너라고 강조하며 내 죄책감을 건드렸다.

어쩌면 상대는 내 취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걸 건드렸던 거 같다.


이게 요새 흔히들 말하는 가스라이팅이 아니려나, 싶긴 하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산전수전 다 겪어봐서 어느 정도의 지혜가 있다고 믿었는데, 말로만 듣던 가스라이팅 속에서 몇 년간 헤어 나오지 못했던 날 돌아보자니, 앞으로는 난 그냥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게 맞을듯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생각하게 되어서 어렵게 결정해 상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길 결정했던 순간, 상대로부터 맹공이 날아왔었다.

이 관계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게 내 탓이라고 직접적으로는 절대 말하지 않으면서, 그걸 온몸으로 그리고 둘러대는 말로 표현했다.

절대로 대놓고 드러나지 않아서 상대가 드러내놓고 가해자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내게 무언가 힘든 일이나 잘못된 게 있다며, 짐짓 걱정하는 척하며 교묘하게 그런 생각을 내게 심더라.

그 부분을 상대의 방식을 따라 해서 교묘한 방법으로 꼬집으면, 상대는 꼭 내가 꼬아들었다는 식으로 온갖 착한 척, 피해자인 척하며 대처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잔머리도 너무 잘 굴러가고, 정치질도 너무 탁월하게 잘하는 상대를 나는 머리를 쓰는 방식으로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그때야 깨달았다.

내가 이어가는 건 대등하고 끈끈한 우정이 아니라, 오묘한 주종관계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뭔가 기묘하고 비정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배수의 진을 쳤다.


나도 대미지를 얻게 되겠지면서도,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날 가해자로 만들던지, 상대가 원하는 걸 절대로 안 해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상대가 가장 좋아하던 건, 내가 그 상대의 통제 아래에서 제 입맛대로 움직여주는 것이었다.

늘 상대에게 공감해 주고, 상대가 필요한 순간에 곁에 있고, 그리고 상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하고 힘든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끊임없이 찬사를 보내주는 것이었다.


상대가 나를 아는 만큼, 나도 상대를 알았기에 나는 절대로 그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상대가 정말 교묘하고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내 머리에 지속적으로 심어주는, 불가능을 요구하는 상대에게 나는 한심하고 눈치 없고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상대가 날 괘씸해하며 내게 복수할 걸 알았지만, 그냥 그걸 감수하기로 했다.

상대가 당장 내게 끼칠 해가 무서워서 내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내 인생이 영향받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벗어났다. 기를 쓰고. 상대가 계속해서 심어주고자 하는 죄책감을 외면하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아이러니한 한 가지는, 내게 복수하듯이 한참 동안 발악을 하던 상대는 내가 단호해지고 상대의 가스라이팅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게 되자, 오히려 온순한 양이되어 지나치게 내 걱정을 하고 살갑게 굴고, 내 눈치를 살핀다.


아니, 당장은 양의 탈을 일단 쓰고 있는 것일 터이다.

나를 다시 잘 구워삶아서 자기 통제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앞으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겠지만.


절대로 인생에서 당하지 않으리라 믿었고, 관계에 미숙한 사람들만 걸리는 거라 굳게 믿었는데.


내가 오랜 시간동안 당하고 보니, 현명한 누군가도 이럴 수 있겠다 싶어서 글을 작성했고, 또한 미래의 내가 혹여나 모르는 사이에 같은 일을 당할까 봐 자신을 향한 당부 겸 이렇게 글로 남겼다.

물론 이제 그 상대와 비슷한 면을 보이는 사람은 애초에 곁에 둘 생각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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