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3. 기록
이번 주말, 사일 간의 연휴기간을 맞아
공기는 유난히 들뜬 기운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
마침 어린이날이 겹쳐 연휴를 맞아 떠나는 차들,
그리고 곳곳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이름표를 단 행사들.
나 역시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가까운 행사장을 찾았다.
비 예보가 무색하게, 그곳은 이미 수많은 가족들의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부모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
공연에 맞춰 함께 웃고 박수 치는 모습들.
그 따스한 풍경 속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이 하루의 의미는 무엇일까.
곰곰이 떠올려 본다.
나의 어린 시절, 오월 오일.
누군가 그날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사실 뚜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많지 않다.
언제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누구와 어디를 갔는지,
기억의 갈피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지 않다.
그 시절의 나와 형제, 그리고 부모님의 모습도
그저 아련한 풍경처럼 남아 있을 뿐,
그 시간을 또렷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아마 지금 내 곁의 이 아이도 마찬가지일 테다.
먼 훗날, 성인이 되어 2025년 오월의 어느 날을 기억하려 할 때,
오늘 우리가 함께 보고 웃었던 이 순간들은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일까. 나를 포함한 이토록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기억조차 못 할지도 모르는 단 하루를 위해 이다지도 애쓰는 것일까.
어쩌면 약간의 피로와 스트레스까지 감수하면서.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기억이라는 서랍에만 기대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과 마음밭에 새겨지는 정서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은 아닐까.
오늘 부모와 함께 누린 이 시간의 감촉,
코끝을 스치던 달콤한 솜사탕의 향기,
손을 잡았을 때 전해지던 따스함.
비록 구체적인 사건은 잊힐지라도
이 모든 즐거움과 사랑받는다는 느낌의 조각들은
아이의 마음 속에 소복소복 눈처럼 쌓여,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사랑이라는 나무를 자라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 얻은 안정감과 자양분으로
세상을 향해 따스함을 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머릿 속에 남는 한 자락의 의문은
그러한 성장의 자양분들은
평소에 물을 잘 주었다면 충분할진데,
굳이 ‘어린이날’이라는 특정한 날을 통해
특별한 하루를 제공해야하는걸까.
어쩌면 밤낮없이 일에 매달려 숨 돌릴 틈조차 찾기 어려웠던 옛 어른들에게는
일 년에 단 하루만큼이라도 모든 것을 잊고
오롯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에게는 행복했던 기억 한 조각과 함께
‘가족을 위해 애썼다’는 작은 핑계 같은 안식이 되었을 테고,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늘 바쁘기만 했던 부모님이 온전히 나만을 향해 미소 짓고 함께 해주는,
꿈결같은 하루였을 것이다.
‘워라밸’이라는 말이 익숙해진 요즘에도,
다른 휴일과는 다르게 어린이날 만큼은
오롯이 아이의 눈높이가 세상의 중심이 되고,
아이가 가장 원하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는 날이다.
평소에는 미처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의 작은 모험을 선물하거나
아이의 기쁨만을 위한 나침반을 따라 항해하는,
온전히 아이를 위한 하루를 기꺼이 내어준다.
특별한 하루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은
비록 기억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을지 몰라도
깊은 긍정의 흔적을 남길 것이다.
이런저런 잡상을 했지만,
결국, 뭐가 어쨌든,
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이 된 내게도
한동안 어린이날이 정말 소중할 듯하다.
아이가 오늘의 기억을 간직하지 못해도 괜찮다.
내가 웃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티없이 맑은 웃음을 한없이 내게 주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어린이날은 아이를 위한 것보다는 내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또한 시간이 흘러
아이가 내 곁을 떠나 더 넓은 세상에 자리할 때,
척박한 삶의 어느 순간,
이 시절의 시간들이
문득 떠오르는 햇살 좋은 날의 온기처럼 아이에게 찾아와준다면
그것만으로 내게는 충분하지 싶다.
오월의 하늘 아래,
다시 한번 아이의 손을 꼭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