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진보를 외쳐왔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우리의 공감 능력은 과연 진보했을까?
근래에 각종매체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클로즈업하고, 사고음을 음향효과인 양 편집한다. 최근 무안공항 사고 때 나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어지러워서 몸이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잔혹한 사고 영상은 유튜브 쇼츠를 타고 무한히 재생되며, 조회수는 누군가의 수익이 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각종 비극적인 사건이 '핫이슈'로 떠오르며 격렬한 논쟁의 장이 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피로와 흥미를 동시에 느낀다.
카페에 앉아 친구와 나누는 가벼운 대화 속에서조차, 그러한 타인의 불행을 안주 삼는다.
이러한 현상음 우리가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 고통을 우리의 소유물처럼 다루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 무감각은 어디에 뿌리를 두는 것일까?
우리의 본성? 아니면 사회의 구조?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 고통에는 한계를 지니는 듯하다.
직접적인 위협이 아닐 경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는 자기 보존의 본능이지 않을까?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 본능적 한계를 극대화시킨다.
익명성의 그늘 아래 숨어 타인의 고통을 관망한다. 물리적 거리를 넘어선 심리적 거리감이 우리를 안전지대에 머물게 한다.
화면 속의 죽음은 실제가 아닌 재현된 이미지일 뿐인 것 같다. 그 이미지에 대해 슬픔을 느끼기보다는, 놀라움, 경악, 혹은 단순한 호기심을 먼저 느낀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우리는 현실의 비극을 하나의 서사로 소비하는 것이다.
정보의 과잉도 우리를 타인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듯하다.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비극적인 뉴스들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하나의 사건에 깊이 공감할 틈도 없이, 다음 사건으로 내몰리고, 감정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감정적 방어막을 치게 된다. 일종의 정신적 생존 전략과도 같다.
나아가, 현대 사회는 속도와 효율을 숭배한다. 깊이 있는 사유나 감정적 몰입은 '비효율적'으로 여겨진다. 복잡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 아니겠는가?
결국,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은 인간 본성의 한계와 현대 사회의 구조적 특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되는 이미지 속에서 고통의 본질을 잊고, 진정한 공감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감각의 마비는 우리 사회의 가장 섬뜩한 징후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