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가장 인기 있었던 직업에 대한 소회

가장 컷이 높았던 시절 교사가 된 모범생

by 구름빛

나는 05학번이다. 전교 5등 안에 들어야 교대를 쳐다라도 볼 수 있었고, 사범대의 컷 또한 매우 높았다.

IMF를 건너온 부모님은 어떻게든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을 갖고 계셨고, 막상 아버지는 사업가로

경제적 입지를 다지셨으면서도 나와 동생에게는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었으면 하셨다.


당신께서 일평생 지녀오셨던, 어쩌면 경제력과 맞바꾸어야 했던

불확실성이 싫으셨던 걸지도 모르겠다. 토목 기술사에 준하는 아버지께서는 한창 사업이 잘되던 시절에

가족과 함께 하기가 어려우셨다. 늘 밤샘 작업을 관리하느라 힘드셨고, 평일과 주말 할 것없이 일에 매몰되어 있으셨다.

그러다 보니 아빠 얼굴을 매주 보기가 어려웠다. 어떤 달에는 집에 2-3번밖에 들어오지 못하셨고, 그 마저도 새벽같이 나가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50대 중반에 빠른 은퇴를 결심하셨다.

요즘말로는 경제적 자유, 파이어족이라고도 하는데 파이어족이 될 준비를 해두시고는 모든 일을 정리하셨다.

그런 아빠의 어린시절 꿈은 ‘수학 교사’였다. 아주 잘살지는 못해도 가족과 함께 단란한 삶을 꿈꾸셨다.

당신의 꿈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되었다. 나는 성향상 모범생 기질이 강했다.

결국 체제 순응적인 나는 자연스럽게 교사가 되었다.


당시 임용은 ‘고시’란 말이 어울렸다. 초수에 붙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재수 혹은 삼수를 해야 했다.

내가 시험을 보던 해에는 경기도에서 조차 국어 교사를 100명도 채 뽑지 않아

수도권을 노리던 학생들이 갑자기 강원도로 몰려, 지방에서도 경쟁률이 높이 치솟았다.


그런 시절을 거쳐 고점에서 학교에 들어왔다.

첫 3년 정도는 안정적인 수입, 취업을 했다는 성취감이 있었다. 다들 임용에 합격했다고 하면 대단하다고 해주던 시절이었다.

장학사든, 교감이든 내가 원하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당시에는 박사과정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 학교에서 담임을 맡았던 학생 중 하나가 나에게 욕을 하고, 신발을 집어 던지며 교실을 뛰쳐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발단은 ‘핸드폰‘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핸드폰을 수업 시간에 할 수 없도록 교칙으로 정해져 있었고 조회시간에는 핸드폰을 걷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 반 학생이 몰래 핸드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학생을 지도하겠다고, 핸드폰을 내라고 했고 이에 불복한 학생은 핸드폰을 내느니 집에 가겠다며 무단 조퇴를 감행했다.


학교는 정글이었다. 그래도 나는 적응해 나갔고 가끔은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10년쯤 지난 최근에는 그 뿌듯함이 동력이 되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지도해도, 고마워 하는 사람이 없었고 자신은 수능에서 ‘국어’보다 ‘수학’이 중요하다며

국어 수업시간에 수학 문제를 풀거나 과학 시간에 영어 문제를 푸는 학생들이 늘었다.


거기에 외부의 시선 또한 점차 싸늘해지고 있다.

사회적 위치가 점점 낮아지는 것도 힘든데, 해봐야 200따리 300따리라는 시선도 있다.

그러면서도 한 켠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많이 봤는다’는 비난이 함께 존재한다.

언젠가부터 교사라는 직업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왜들 그렇게 교사의 월급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지.

교사 따위가 뭘 그렇게 복지나 월급에 신경 쓰냐는 시선도 적지 않다.

그래도 라떼는, 대기업을 갈 수 있는 학벌과 성적임에도 교사로 트는 사람도 제법 많았는데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점에 이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최근에는 면직 인원도 늘고 있다.

겸직도 안되고, 10년차가 되어도 200만원대 월급을 받으니 아이가 생기면 삶이 팍팍해진다.

그러니 젊은 교사들의 경우 면직을 하거나 크리에이터로 전향하는 비율이 늘수밖에 없다.


나도 적잖은 시간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어떻게 하면 더 돈을 벌 수 있는지 방학 때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잊을만하면 오는 졸업생들의 연락, 선생님 덕분에 힘든 시기를 잘 거쳤다는 인사.

(당연히)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 뿌듯함을 느낀다.

그렇게 십여년 동안 나도 성장했다.

아이들에게 글쓰는 법을 가르치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고 퇴근 후 자기개발을 시작했다.

특히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그래도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 가지 않아서 외로웠고, 친구들을 학원에서 만나도 ‘공부만 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생활 태도를 비롯하여 동료 간의 사회성, 어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공간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학교’를 ‘입시를 위한 도구‘ 정도로만 여긴다.

‘싫으면 전직하세요.’라는 말도 많이들 하는데, 학교를 입시 도구로만 바라보는 프레임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있는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부모나 학생에게 존중을 바라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떻게든 노력하며 양질의 교육을 하려 노력하는 선생님들이 많은데 세상은 그 사람들을 ’자본주의의 잣대‘로 평가하고, 폄하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 남을 예정이다.

책임감으로 최대한 학생들을 끌어 안고 가면서 글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 남아서.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이 뿌듯하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 그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십여년 동안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직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 주변에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다. 진심으로 아이들과 소통하고, 아이들이 졸업 후에도 때때로 상담사의 역할을 하시기도 한다.

늘 수업에 대해 고민하고, 스터디하고 새로운 교수학습의 틀을 만들어 나가시고 방학도 반납하고 연수를 듣고 자신의 글을 쓴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자기개발을 한다고 돈을 더 주지 않는다. 물론 운이 좋다면 외부 강의가 들어올 때도 있고,

문제집이나 교과서 개발에 참여하게 되기도 하지만, 심지어 그 일들도 ‘수업’과는 별개이다.

수업은 오롯이 학교에서만 존재하는 독립된 일이기 때문에 이 수업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노력은 선생님들의 개인 노력이다.


나는 이런 선생님들의 열정이 좋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집단에 속해서 나 또한 좋은 영향력을 받고 있다.


그러니 존중 받았으면 좋겠다.


문제가 있는 교사는 ‘교사라서’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모든 직업군에는 문제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몇몇 직업군은 영향력이 커서 그런지 ‘직업군’의 문제 자체로 인식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구분되었으면 좋겠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문제 있는 사람들의 행동만 부각되는 세상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최근, 교사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유입되는 젊은 선생님들이 있다. 이 팍팍한 세상에, 민원이 많은 세상에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니.

그들의 사명감은 분명 나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그 분들이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미래를 대비하는 공부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