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숙제

by Hache

생각이 많아지는 비오는 밤이다.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것은 처음이다. 손으로 느낀 죽음의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속성, 그 한계에 대한 슬픔이 가슴 깊이 박혀버렸다. 원래도 온갖 슬픔을 일상처럼 머금고 사는 사람인데, 죽음이란 속성이 하나 더 추가되어 어둠의 그늘이 한층 더 깊어져 버렸다. 그리고 궁금했다. 어디로 가신 걸까.


몸이 무겁다. 아무리 자도 잠이 계속 온다. 평소엔 감미롭게 느꼈을 잔잔한 음악에도 눈물이 난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것에 대해 무척 무던한, 소시오패스적 성향이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느새 주변을 위로하고 있고 나서서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화장 후 유골함을 들고 섬마을 시골집을 돌아볼 때에는 한참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함께 온 가족들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무엇 때문에 난 이곳을 수년간 등지고 있었을까. 어떤 미움이나 오해 같은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아무 가치도 갖지 못했다. 마지막. 막연했던 단어가 실재에 이르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한 뼘이나마 그간 성장해서일까? 지난 3일은 지지부진했던 생각이나 삶의 태도에 변곡점이 되어줄 것 같다. 겁을 먹고 마주하지 못했던 것들, 나태해져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 지나치게 신경 썼던 가치 없는 일들, 쓸데없는 탐욕, 오만, 미움 등등... 고인이 일러준 것들을 잊지 않고 내 삶에 물들여 가게 되길 소망해본다.


다시 돌아온 서울엔 비가 많이 온다. 선산, 묘터, 유골함 위로 쏟아지던,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 내리는 차갑고 고운 흙의 감촉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을 뒤덮던 마지막 인사의 순간, 적막. 새소리. 멀리서 들리는 잔잔한 파도소리. 섬 특유의 비린내와 소금기가 섞인 바람. 적당히 따스한 햇빛. 어쩐지 내내 울렁거렸던 마음이 평온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


모든 절차를 마치고 선산을 내려온 가족들의 표정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산 아래 푸르게 펼쳐진 넓은 마늘 밭 사이 자그만 공간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다시금 일상의 얘기를 나누며, 돌아간 이후의 삶을 계획하는 듯했다. 산 자는 그 삶을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 남겨진 이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잔인한 숙제를 위해 죽음의 무게를 얹고 그렇게 일상으로 복귀한다.


긴 세월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안녕히.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잔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