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장마

by Hache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근 두 달 정도 몸과 마음이 계속 소진되는 상황의 반복에 힘들어하고 있다가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일요일을 맞았다. 적당히 따뜻한 햇볕,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 데워진 몸을 적당히 식혀주는 바람, 코 앞에 온 여름의 냄새까지.


이런 평화로운 느낌을 받는 때면 늘 제주를 떠올리게 된다. 먼 유럽 대륙까지는 가보지 않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은 몇 곳 다녀봤고, 나름의 안정감과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 준 곳도 있었지만 늘 마음속 평화를 주는 상황마다 제주가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회에 지칠 때마다 위로가 되어 준 곳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고향도 아닌데 마치 그렇게 마음속에 자리 잡혀버렸나 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회인으로서 나의 배터리는 금세 소진되어 버렸다. 일의 종류가 문제가 아니라 삶의 형태가 문제였던 것임을 이젠 알 것 같다. 끝없이 스스로를 벼랑으로 몰아세워야만 하는, 만족감 없이 강요되는 성취 중심의 한국 문화에 지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근 1년 사이에 무척 자주 생각하는 것이지만, 자식을 낳고 30년씩 일을 하며 살아온 대다수의 부모 세대는 참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다. 부품이 되어 돌아가는 이 삶에 난 도통 적응할 수가 없다. 그저 어지러울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도무지 난 누군가의 유의미가가 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완전한 고립은 두려워하면서 눈에 보이는 거리만큼의 연결만 원하는 생각이 무척 어리석게 느껴진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지만, 그게 두렵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냥 공원의 풀 같이 살 순 없을까? 생각하다가도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나.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싫어도 감내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또 생각하다가, 도돌이표가 되는 상황에 지친다는 생각마저도 지쳐 그만 하게 된다.


한 걸음 내디디면 벼랑 끝일 것만 같은 2020년, 30대 한가운데를 지나는 6월의 어느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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