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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씨 Jul 19. 2023

시간이 왔어요

힘들면 글이 써져야 하는데 왜 글에 손이 안 갈까? 힘들지 않은 건가? 알고 보니 평범한 회사원, 평범한 출근의 삶이 적성에 맞았던 건가? 아니면 마음이 편안해진 것일까?


사무실의 삶은 평온하다. 주 5일, 하루 8시간을 돈을 받고 팔았다. 매일 8시간을 팔기 위해 출퇴근길을 감내한다. 짐은 아무것도 없다. 오른쪽 주머니에 휴대폰, 휴대폰에 연결해 놓은 이어폰, 왼쪽 주머니엔 교통카드와 법인카드, 그리고 셔츠 주머니에 마스크를 넣고 길에 오른다. 조선시대 봇짐장수 같이 팔 물건을 이고 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장터로 갈 필요가 없다는 건 다행이다. 자주 봇짐을 든 K-아재들을 본다. 무천도사 등껍질마냥 등뒤로 거대하게 튀어나온 못생긴 검은색 백팩들, 크기로 보나 어깨끈에 생긴 텐션으로 보나 족히 10kg은 넘어 보인다. 조선시대가 끝난 지 600년도 더 넘었지만 조상들의 몸속에 수백 년 각인된 봇짐장수의 유전자가 그들에게 짐을 싸도록 유도하나 보다.


지금은 시간을 파는 시대. 시간이 왔어요, 시간이 왔어요, 값싸고 맛있는 시간이 왔어요, 이 시간 한번 사 잡솨봐. 봇짐을 진 K-아재도, 시속 60km로 달리는 덜컹이는 차 안에서도 화장 고치기에 여념이 없는 MZ도, 두 손 두 어깨에 아무것도 없는 나도 모두 여덟 시간을 팔기 위해 매일 아침 장터로 가는 길에 오르는 봇짐장수들이다.

안녕하세요.

안ㄴ...

대충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다. 누가 인사를 받든 말든 관심 없다. 다른 장사치들 역시 착실히 시간을 싸들고 오늘도 자리에 앉아있다. 아직 장터 개장시간이 아니지만 분주함이 느껴진다. 난 정시를 지킨다. 내가 파는 것은 시간, 일분에 오백오십 원 정도로 협약했다. 시간은 팔기 편하다. 팔고 사는 물리적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아 돈이 실시간으로 나간다는 생각에 이르지 못한다. 3차원 인간이 가지는 인지 시스템의 한계. 이점을 적극 활용한다. 내가 무얼 하고 있건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고 굳이 매일 목청 높여 내 것을 사라고 떼쓰지 않아도 된다. 매분 따박따박 꽂히는 내 돈. 기회비용? 음... 이건 좀 어려운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 시간을 팔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응하는 일이 매분 오백오십 원의 가치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더 높은 가치에 팔릴 수도, 전혀 없을 수도 있는 시간 변동성 높은 특징을 지닌다. 이미 현재의 방식에 적응한 대다수는 팔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도 팔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 역시 오래된 시간봇짐장수.


사무실에서의 삶은 역시 평온하다. 시간을 팔았으니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사용의 권한을 넘기고 아바타처럼 시키는 일을 한다. 그저 시키는 일을 한다. 그것이 최선이다. 시간이  것이라 착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자의지는 없앤다. 무언갈 하고 싶어도, 해야  것을 찾아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충실히 시키는 일만 한다. 기실 계약에 의거한 관계이고 판만큼 받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마틴루터킹 이전 흑인 노예들과 다를  없다. 쉬는 시간마저도 자의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평온하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디에 팔지, 어떻게 팔지, 얼마에 팔지, 어떻게 가치를 입증할지, 어떻게 현혹시킬지 고민하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 시간은 공평해. 물리학의 발전으로 질량이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미침이 밝혀졌지만 우리는 인간, 인간 정도의 질량으론 어림없다. 모두 동일하게 흐르는 시간축에 서있다. 그저 고통스럽게 느끼는지 그렇지 않는지가 주관적 시간의 차이를   상대적 시간은 완전히 동일하다. 1분이 흘렀다. 옆자리 장사치는   삼백 원어치 팔았다. 뒷자리는 이백오십 원을 팔았다. 앞자리는 육백 원을 팔았다. 1. 띠링. 1. 띠링.  1 띠링띠링띠링. 돈이 쌓인다. 꾸준히 진행되는 결제, 입금소리, 행복한 입금소리. 평온하다. 행복하다. 여덟 시간의 자의지를 없앴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어차피  노예새끼들. 글이  써지는  행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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