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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씨 Apr 10. 2024

습작 1

변신, 사우뜨 코리아

https://brunch.co.kr/@endurance/259

서울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간다.


20대 후반, 어딜 가더라도 세상은 낭중지추 같은 나를 감히 모른 척하기 어려울 거야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서울로 올라왔다. 송곳은커녕 손가락에 걸리적거리는 먼지도 되지 못한 채 미적지근, 뒤늦게 마셔 다 식고 김 빠져버린 생맥주처럼, 흐느적거리는 이른 여름의 저녁이 또 돌아온다.


퇴근 후 시간은 늘 비슷하다. 저녁 식사는 미루고 자그마한 소파에 앉아 곧바로 맥주로 위를 채우며 보지도 않을 bgm 좋은 유튜브를 틀어두고, 또 별 생산성 없는 망상에 빠져든다.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라니... 현대 사회에, 아니 헬조선, 그 지옥 중에서도 센터 오브 더 센터인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아직도 자유로울 수 있다느니, 유튜브 채널에 나오는 리틀포레스트 같은 영상 속 주인공처럼 너른 들판을 보며 풀 같이, 살랑이는 봄바람 같이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느니 하는 망상을 여전히, 아직도 10년이 지나서도 하고 있는 것은 이놈이 여태껏 성장을 하지 못했거나. 아니, 애초에 지능이 아주 낮은 생명체인 게 분명해.


탈출구가 있다는 희망을 계속해서 품고 있는 것 같다. 왜,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들을 보면 도무지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없을 것 같은, 아니 그냥 자살하는 게 나을 것 같은 세계관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공을 가슴에 박아 넣은 주인공만이 살아있는 눈빛으로 절망의 시간축을 걷고 있지 않는가? 축 늘어져 흐믈흐믈 매일 맥주에 적셔지는 스펀지만도 못한 몸일지언정 칼로 헤집어보면 희망이라 써진 허연 공이 어딘가에서 또 불쑥 튀어나올지도. 이런 생각까지 가는 건 좀 끔찍한가?


맥주 한 캔이 비워지는 건 순식간, 참고로 요즘은 500ml 보다 330ml를 주로 마신다. 매일 마시는 술을 보니 알코올중독이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 줄여보기로 결심한 결과이다. 뭐,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아니, 실은 결심 따윈 없다. 330ml 두 캔을 마시는 게 왠지 더 기분이 좋을 뿐. 그런데 정말로, 대문만 한, 와이드 스크린 창이 있고, 계절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풍경을 보며 평일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되면 영상을 끄게 될까? 말없이 가만있어도 충만해지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까?


출근버스에 올라도 의문은 그대로이다. 글쎄, 이런 고민은 비단 하루 저녁 아침 정도의 짧은 기간은 아니긴 하다. 확실히 중고등학교 시절, 아니 대학생 시절까지는 이런 고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때 삶의 대의는 음,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좋은 성적 남기기? 이걸론 좀 부족하다, 그래도 개중에 무척 재밌어하던 공부들이 제법 있었으니. 성적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크게 가치를 뒀던 것은 아마 ‘이 모든 인고의 끝이 존재한다’ 좀 더 나아가 ‘광야를 지난 후 약속된 천국에 닿으리라’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제법 이런 나도 괜찮은 종교인이 아니었나 싶다. 천국을 믿었다니, ‘약속된’ 무언가가 생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니.


사실 누구도 믿음을 강요한 적은 없다. 그저 일상으로 접하는 어린 영혼들을 현혹시키는 대중매체들, 예를 들면 세기말 방영됐던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 그랬던 것 같고 또,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쨌건 수많은 매체들이 “네 눈앞에 놓인 OMR 카드만 제대로 채워 넣으면 더 이상 점수의 스트레스는 없고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행복한 대학생활이, 직장생활이 보장될 거야!”와 같은 메시지를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입하다 보니 어느새 헬조선 아이들은 그것이 보장되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기고 매일의 공부를, 점수를 향해 좀비같이 발걸음을 옮겨왔던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덕분에 고민은 없었지. 뭐라도 믿는 구석이 있으면 잡생각은 떨쳐내고 그것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니깐. 아마 이미 늙어버린 여기 이 지하철 안의 대부분도 셀프 가지치기를 했을 것이다. ‘경기도 자가에 사는 냥냥실업 김 부장’ 정도의 타이틀이면 분명 행복한 인생이다, 매일 아침저녁 두 시간여, 한주에 열 시간, 한 달이면 사십 시간, 일 년에 사백팔십 시간은 어둡고 습습한 지하 속에 처박혀 있어도 나 정도면 행복한 편이다. 하루를 온전히 ‘사우뜨 코리아 시스템’에 종속된 노예로 바쳐야 해도 난 ‘경기도 자가에 사는 모모실업 김 부장’이니깐, 내 연봉은 동일 직군 블라xx 조사 평균 연봉보다 20퍼센트나 높으니깐, 내가 선택한 직장이니깐, IT 산업의 선두에 있으니깐, 행복한 편이다. 30년 상환 5억 빚을 안고 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애견펜션에도 함께 놀러 가니깐 엄마 아빠는 분명 성공한 인생이야, 마스터베이션 마스터가 되면 너도 뇌 없이 행복할 수 있단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 생의 비기나 전수해 주겠지.


행복한 이들의 얼굴을 때론 가만히 살펴보게 된다. 어차피 출근길은 어둡고 습하고 조명이 켜져있긴 하지만 움직일 공간은 없어 그저 멍하니 서있거나 기껏해야 노래를 듣고 있을 수 밖엔 자유가 없기 때문에, 출근길엔 아는 이를 마주쳐도 모른 척, 아직 대인 인지 시스템이 활성화되는 시간이 아니어서 시각 정보로 “인지해! 네가 아는 사람이야!”가 들어와도 행동 처리 중추는 ‘영업시간이 아닙니다’ 간판을 걸어놓고 있기에 누구도 얘기하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는다. 그저 고요히, 아주 고요히, 선로를 따라 좌우로 발생하는 미세한 진동을 따르는 몸짓 정도만을 보인다. 덜컹덜컹, 흔들흔들, 소리와 몸의 움직임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바깥은 완전한 어둠, 형광등만 밝은 긴 애벌레 같은 작고 길쭉한 공간에서 똑같은 광경을 매일 보지만 물리지도 않고 항상 신기하다. 아마 단일시간 개체수 만으로는 이곳, 같은 지하터널을 공유하고 있는 바퀴벌레들보다 많을 인구가 1인당 20제곱센티미터 정도의 공간만 차지한 채 빽빽이 차 있는데도 이렇게 조용하고 이토록 아무 일도 없을 수 있을까 싶다. 뉴스에선 매일 갈수록 더해지는 강력범죄 얘기들, 이를테면 가방 속에 있던 과도를 꺼내 주위에 있던 십여 명에게 각각 5회 정도의 칼침을 놓다가 의협심 강한 세명의 남자들에게 제압 당해 경찰로 인계됐다던지 하는 사건들이 횡횡하는 사회에서 이토록 모두가, 키도 얼굴도 직업도 근육량도 사상도 가족관계도 살아온 인생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곳에 이토록 모두가 조용할 수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필요한 곳에서 조용히 내리기만 할 수가. 아직도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출퇴근 지하철 내 인구밀도 대비 범죄율 통계치를 기네스북에 제출하면 아마도 음... 어떤 타이틀로 등재되려나... 색채 없는 국민의 사회? 아니면 기네스북 대신 통계치를 입수한 미국 일간지 기자가 ‘사우뜨 코리아, 조용하지만 사실은 노뜨 코리아보다 강도 높은 인권유린국가’란 제목으로 신문 3면 정도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 맨 아래층에 있는 애들이 안 움직여요! 왜 이런 거예요?”

“괜찮아, 얘네는 원래 매일 여덟 시에서 아홉 시 사이에는 갑자기 이렇게 가만히 있단다. 이렇게 있으면서 하루동안 움직일 에너지를 얻나 봐. 꿈이라도 꾸는지 종종 꿈찔거리는 애들도 있으니깐 자세히 관찰해 보렴!”

“얘네 건드려보면 안돼요? 가만있는 걸 보는 건 너무 지루하단 말이에요.”

“그럼 큰일 나요. 엄마도 어릴 때 한번 건드려 봤는데 서로 물어뜯고 죽이고 도망치고 하는 통에 안이 엉망이 돼서 통째로 폐기처분 해야 했단다. 얘네는 그냥 둬야 해. 자기들보다 거대한 무언가가 박스 바깥에 있다는 걸 아는 순간 통제할 수 없게 될 거란다. 엄마는 그래도 어쩐지 그때 꽤 재밌었던 것 같구나.”

“뭐가 재밌었어요?”

“너한테 이런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음... 왜 박스 안에 평생 갇혀있다 폐기 처분될 운명인데 쿡쿡 찌르니깐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냥 꿈틀대고 반항하고, 정작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엄마인데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싸우니 조금은 생의 진실을 알아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그 모습 자체로도 재밌었지만 말이야. 호호호”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엄마.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걔네가 힘들어했던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저는 건드리지 않을래요. 그런 모습을 보는 건, 분명, 잘 모르겠지만 조금 슬플 것 같아요.”

“우리 지우는 이렇게 착하구나. 하지만 언젠가 엄마가 해준 얘기가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될 거란다. 그때쯤이면 멋진 성인이 돼서 아빠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고 있겠지?”


문이 열리고 물밀듯이 사람들이 나간 자리엔 강남역 세 글자가 보인다. 어쩐지 이틀이 지난 것 같다, 아니, 3일인가? 매일 거의 똑같아서 요일도, 날짜도 헷갈린다. 그래 뭐, 대충 하루가 지났다 치고, 어제와 달라진 점이 뭐가 있는지 주변을 좀 관찰해 본다. 지하로 내려오자 아직 출발하지 못한 열차가 있어서 늘 그렇듯 끝 칸 까지는 가지 못하고 초록색 칸막이가 보이는 중간쯤에 서있다는 것, 여름이 한걸음 더 다가왔는지 객실 안 에어컨 온도가 좀 더 낮아진 것 같다는 점, 또, 없다. 정확히 없다.


매일이 다를 수 있던 시절은 이제와 보니 행복한 기억이다. 아직 생의 진실에 다다르기 전, 흐릿한 희망과 또렷한 자기 과욕을 가지고 살 수 있던 시절들 말이다. 비교해 보면 딱히 그때도 지금과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표를 소화한다, 잔다, 누구나의 삶이 다 이렇지 않았던가? 크게 달랐던 점이 있다면 자그맣게 주어지는 쉬는 시간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고 보냈다는 점. 수업과 수업 사이 단 10분의 시간이지만 교과서를 덮고 서랍에서 곧장 읽던 책을 꺼내 읽곤 했다. 초등학생 때는 이문열 삼국지를, 중학생 때는 퇴마록, 가즈나이트 등 판타지 소설을 주로 읽었다. 이때까지는 비교적 비현실적인 내용에 푹 빠져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자 비문학, 비평서에 빠져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등 선생들이 주입한 제한적인 사고의 시야를 깨고 지구 시민적인 사고체계를 갖춰 나갔다. 문의 저편에 있는 이야기들, 그런 것들만 이 가슴 뛰게 만들었던 것 같다. 아직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고 의심치 않았던 때, 물론 쉽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대가를 지불해야겠지, 모아둔 돈을 다 털어 낸다던지,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아이를 낳고 3대가 모여 양평 한 펜션의 칠순잔치에 가족티를 입고 단체사진을 찍는다던가 하는 그런 코리아 스탠더드들. 어차피 가치를 느끼지도 못하니 다행히 미래의 내가 떠나는데 어떤 망설임도 없겠지.


스무 해를 훌쩍 지나고 서른, 몇 번이건 다시 보며 굉장히 골몰했던 영화들이 떠오른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소라닌, 새 구두를 사야 해. 새 구두를 사야해는 내게 특별하다. 고교시절 홍세화, 목수정 씨의 글을 접한 이후로 마음속에 심어져 버린 프랑스라는 씨앗. 가진 것도 기반도 없는 곳에서 맨몸으로 부딪히며 스스로 스스로를 온전히 살아내는 시간들, 아름다운 도시 파리이기에 외롭거나 궁핍하지만 순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음에 박제되어 버리는 햇살, 에펠탑, 라 세느, 서북부유럽은 대부분 날씨가 흐리다고 하지만 잿빛 하늘을 배경 삼더라도 이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장면은 하... 마흔이 가까워오는 비슷한 어느 요일의 출근 버스에서도 이토록 맘을 흔들어 놓는다. 새 구두를 사야 해의 주인공처럼, 잠시 스쳐가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인연은, 아쉽고 놓아주기 너무도 아쉽고 힘들지만, 다음날 아침, 정원 중앙 벤치에 앉아 덤덤히 햇살을 쐬며 행복했던 시간, 감정들을 회상하는, 또 한 통의 편지로 연약하게 이어진 희망의 끈만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98프로의 고독과 1프로의 희망, 그리고 1퍼센트의 파리. 이방인의 삶, 고아, 문을 넘어온 사람들의 고독과 출렁임, 잔잔해지려 애쓰는 마음들을 내 몸에도 담아내고 싶어. 내 희망은 묻혀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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