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아니,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서 인생영화라는 테마를 가지고 두 편의 영화, '인사이드 르윈'과 '프란시스 하'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 두 영화는 '르윈'과 '프란시스'가 담담하게 그들의 삶을 살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무척 평범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짜 우리네 인생(에 관한) 영화이다. 두 영화가 인생영화로서 닮아있는 점은 그 이야기 속에 우리가 꿈꾸는 '로망'은 없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이 두 영화를 보며 우리는 거대한 쾌감이나 러닝타임 동안 잠시 일상을 탈출하는 후련함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지리멸렬한 매일의 삶을 더 크게 느껴 다소 어두운 기분이 된다. 역시 이런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시간짜리 일탈의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 볼 때 'The secret life of Walter', 국내 제목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균형을 잘 잡은 인생영화이다. 일탈, 로망, 쾌감과 같은 대중이 영화에 바라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지하게 인생에 관해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영화, 이 영화는 극 중 배경부터 '이것은 너희들의 인생에 관한 영화이다'라는 점을 대놓고 드러낸다. 월터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이름이 바로 'LIFE magazine'이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역시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크린 중앙에 대놓고, 그것도 인물들 위에 새하얗게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나온다.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is the Purpose of LIFE."
이 문구는 LIFE지의 모토로 영화의 중요 장면마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데(대략 다섯 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장 하나가 두 시간의 영화 전체를 이끌어 나가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문장 자체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마음에 드는 말인 만큼 가장 아끼는 '인생 책'중 하나의 책 앞표지 바로 뒤에 이 문장을 써놓았다.
"세상을 보는 것은, 위험한 것들이 다가와도, 벽(위험) 너머를 보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위험 너머의 세상을)함께 찾고 느끼는 것. 그것이 삶의 목적이다."
세상에, 누가 한 말인지, 정말 멋지지 않은가? 삶의 목적 자체가 늘 위험을 마주하며 그 너머의 세상을 함께 찾고 느끼는 것이라니, 이 나라의 기성세대들이 주입한 삶의 목적인 '너 혼자 경쟁에서 승리해라', '안정적인 삶이 최고다', 혹은 '철밥통과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와 너무도 큰 가치의 차이를 보여준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LIFE지의 모토를 마음속에 새겨왔다면 내 삶은 지금쯤 어디로 가 있을까?
한국에서 20년 이상 타인에 의해 주입된 삶의 목적을 가진 이 나라 젊은이들은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수년의 꽃다운 젊음을 고시원의 깊은 어둠 속에 묻어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쉽게는 우울증, 이직, 퇴사, 소규모 창업, 늦은 '갭이어(gap year)'에 대한 선택을, 심한 경우는 자살까지 이르게 되는 현실을 보면 우리에게 주입되었던 기성세대의 가치가 잘못되었음은 물론이요, 우리 몸속 깊숙이 독소처럼 퍼져 이제는 원상복귀시킬 수 없는 거대한 정신적 장애를 만들어 놓았다고 보인다. 물론 이러한 문제가 비단 한국사회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 이 영화는 미국 영화이다. 서양 국가 역시 삶의, 인생의 진짜 의미에 대해 이제야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다.
월터는 정신병의 일환을 가지고 있다. 일명 'Zone out', 혹은 'day dream'으로 불리는 이 증상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상 속에서 자신의 채워지지 못한 욕망을 표출하는 꿈을 꾸느라 현실의 자신을 깜빡 잊어버리는, 말 그대로 선채로 '백일몽'을 꾸는 현상이다. 월터의 이 day dream은 무척 다이내믹하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슈퍼히어로와 같은 엄청난 결투를 벌이기도 하고, 때론 극지방 탐험가가 되기도 한다.
영화 앞부분에서 우리 모두는 월터의 상상하는 장면을 흥미롭게 보게 된다. 왜냐면 이 상상들이 우리가 원하는 '일탈, 로망, 쾌감'과 같은 요소들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어느새 그의 상상이 아닌 그가 펼치는 실제 삶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심지어 나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영화의 특정 지점부터 그의 day dream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Arcade fire의 앨범 Funeral에 수록된 곡인 'Wake up'이 나오는 장면이 바로 월터의 상상이 비로소 현실이 되는 지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니 주목해서 보기 바란다.
일상을 살고 있지만 늘 무언가 결핍을 느끼는 우리, 상상하는 것들을 현실의 제약으로 상상으로만 머무르게 하는 우리, 영화처럼 심하진 않지만 우리는 모두 늘 조금씩 Zone out 중이라고 생각된다. 월터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이다. 우리에게 일탈과 로망, 쾌감을 주지만 비현실적 영화 속 슈퍼히어로들이 아니다. 월터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루어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가까운 미래 모습이다. 두려움이 있어도 직시하고, 당당히 다가가 그 너머의 세상을 찾고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 살아있음을 느끼는 진짜 인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결핍을 느끼는 당신과 나 모두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월터가 될 수 있길 바라며, 또 행복의 결핍을 느끼는 수많은 SNS족들이 사이버 세상의 꿈에서 빠져나와 진짜 자신의 삶을 살길 바라며 극 중 위대한 사진작가인 '숀 오코넬'의 대사로 글을 마친다.
"Beautiful things don't ask atten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