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규격보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나무가 좋아
규격은 규격을 벗어나는 것을 금지한다. 프레임은 프레임을 벗어난 해석을 금지한다. 처벌한다. 한국에서 담배는 합법이지만 대마는 불법이다. 네덜란드는 대마는 합법이지만 또 다른 약물은 불법이다. 시스템에서 피어난 사람은 시스템이 정한 경계 안을 살아간다. 경계는 선과 악을 가른다. 경계는 도덕과 부도덕을 가른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른다. 경계 밖으로 내민 발이 보이면 잘라버린다. 규격에 벗어난 부품이 보이면 모양에 맞춰질 때까지 갈아버린다. 그렇게 동그라미가 된다. 네모가 된다. 세모가 되고 한쪽 팔이 없어진다. 뇌의 4분의 1 지점은 빈 공간이 된다. 시야의 15도 정도는 맹인이 된다. 특정 영역대의 주파수에 귀머거리가 된다. 햇빛이 예쁘고 꽃향기 만발한 4월 3주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목요일에도 금요일에도 콘크리트 무덤 속으로 자발적인 걸음을 옮긴다. 자발적 복종의 성실한 국민이 된다. 돌려받지 못할 국가연금을 매달 20만 원 넘게 낸다. 누군가의 인식 속엔 성공의 모습일지 모른다. 탈출은 매일 매시 매분 매초 꿈꾼다. 철창을 벗어날 상상만으로 잠시간 시름을 잊는다. 자고 일어나 또 버스에 오른다. 비가 와도 우산 없이 퇴근길에 오른다. 씻거나 씻지 않고 잠든다. 어차피 똑같은 콘크리트에 들어가는데 씻었거나 비를 맞았거나 꿈을 꾸거나, 아니면 오차 하나 없는 규격화된 자아를 형성하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지금에 이르러 학생들을 마주한다면 좀 다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규격화 사회에서 규격은 논리적, 비논리적 신성불가침 영역을 만들어 낸다. 과연 영역 밖에서, 신성을 거스르고 난 존재할 수 있을까.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숫자의 무게는 부양할 무언가가 있건 없건 나를 짓누른다. 달리 뭘 해서 이 정도의 가치를 매일 만들어낼 수 있나? 트렌드도 이미 한참 지나 그저 마이너 문화 중 하나로 간혹 들려오는 디지털노마드라던지. 우후죽순 생겨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독립서점이라던지. 객관적인 지표를 헤아려보자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마” 이것만이 정답이다. 영원을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나 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가꾸어가는 일상을 살아내는 것. 그게 수백 년의 세월을 거쳐 거대한 소나무가 되든, 집 앞 자그마한 카페 안뜰에 심어진 작은 앵두나무가 되든 그것이 나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기적인가? 무릇 유교문화권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신체발부수지부모 하고 대를 이어 가족을 기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가? 나로서 살아가는 나와 타인의 기대에 부흥하는 나는 공존할 수 있는가?
당장 내일 내가 기쁠 수 있을 일을 하루하루 해보기로 한다. 일 년 후, 십 년 후와 같은 단위는 나를 재단하기엔 너무 거대한 줄자이다. 하루 뒤, 이틀 뒤, 열흘 뒤, 그냥 주어진 하루를 나로서 충만히 살아내는 것만을 목표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원수로 자라나든 보호수가 되든 자유로이 자라난 나라는 모양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가지치기 당한채 10년 후 하늘로만 한줄기 우뚝 솟아 있는 모양보단 한 뼘쯤 그늘 드리울 정도로 넓어져 참새든 강아지든 쉬어갈 수 있는 모양이 된다면 조금 더 만족스러운 스스로를 마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