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격 외 04

도시로부터 도망친다는 클리셰

by Hache

이런저런 많은 말을 늘어놓더라도 결론은 하나다. 도시가 싫다. 아니다. 속내를 살펴보면 남이 만든 시스템에 시간을 팔아 돈을 얻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정말로 진심으로 스스로를 혐오스럽게 느껴지게 만든다는 것.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도 이 자기혐오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도망을 생각하게 만드는 핵심이다. 좋고 싫고 기쁘고 슬프고 힘이 넘치고 힘이 없고. 일련의 감정들은 모두 하루하루의 ‘나’를 만드는 요소들. 내가 나로서 만들고 싶은 대표 감정은 평온이다. 조직에서의 나는 평온할 수 없다. 모인 사람 수만큼 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사회 조직. 홀로 평온하고 싶다고, 오늘은 우울하고 싶다고 허용되지 못한다. 옆 사람이 힘이 넘치는 날이면 나의 우울은 존중받지 못한 채 소음 속에 흘러가버린다. 뒷사람이 화난 날이면 나의 기쁨을 숨겨야 한다. 열개의 감정이 열명 모이면 10의 10 제곱만큼, 백 명이 모이면 100의 100 제곱만큼 감정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고 자연히 나의 감정은 0으로 수렴한다. 아니, 0이 되고 이내 마이너스가 된다.


사람이 싫어지면 으레 그곳이 한국이라면 한 번쯤 시골 이민을 생각한다. 제주이민을 한 번쯤 마음에 품지 않은 한국 직장인은 드물 것이다. 직장생활은 내 평온을 흔들어. 10년이 지나도 멀미가 멈추지 않아. 익숙해지지 않아.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을 땐 나를 고쳐보려 정신과와 상담소를 찾아보기도 했다. 지금은 뚜렷하다. 이건 흔들리는 배에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내가 고쳐져야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12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돌아오면 곧장 전원주택을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들을 찾아본다. 개별등기된 토지인지, 자재는 목조인지 철근콘크리트인지, 외지인이 들어가 생활 가능한 지역인지. 무엇보다 지금 가진 돈으로 해결 가능한 금액인지. 돈. 돈. 또 돈이다. 흔들리는 배에서 내린다고 끝나지 않는다. 내려봐야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거대한 배를 타는 것일 뿐. 도망칠 곳은 없다. 흔한 SNS의 시골 이민 클리셰는 밝은 햇살, 체리목 넓은 테이블, 커피 한잔, 마음 포근해지는 음악, 귤 밭 길 산책, 노을, 뭐 이런 것들. 사치스러운 것들. 2025년 한국 직장인에게 일 년에 두어 번 남짓만 허락된 사치. 누구든 꿈꾸지만 출퇴근길 무표정하게 SNS를 소비하며 만족할 수밖에 없는. 손에 닿을 것 같은데 절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것. 이야기를 꺼내놓으면 “응원해” 한마디 듣지만 응원을 건네는 이도 이뤄지지 않음을 짐작하는 쓰디쓴 단문.


어쩌면 그런 클리셰조차 흔하게 소비되어 이젠 특별하지도 않게 들린다. 그럼에도 규격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봄. 하늘 향해 솟은 직육면체 반듯한 아파트 더미를 보며 계획을 세워본다. 나의 이야기도 뻔한 클리셰가 되든, 잠시 소비되어 사라지는 스낵 콘텐츠가 되든 상관없이 그냥. 이번 생에는 딱 한번 사는 거니깐. 결말이 어찌 되든 도망가야겠다. 오늘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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