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방론은 중학생 때부터
따뜻할 때의 카페라떼가 좋다. 근데 딴일 하느라 오랜 시간 놔두면 이게 커피인지 우유인지 뭔지 당최 맛도 애매하고 별로다(예외적으로 '간이옥돔역'의 서비스 고구마와 라떼의 조합은 스고이!). 이럴 땐 다시 데우는 것도, 다 마시는 것도 별로라 그 존재 자체가 날 고민되게 한다. 드립 커피나 아메리카노, 혹은 그냥 찬 우유를 마시는 게 나았겠다 싶기도 하다. 보통은 그래도 먹을걸 남기는 건 강박적으로 싫어해서 장시간에 걸쳐 다 마시는 편이다.
고구마를 갑자기 먹게 되는 바람에 비유하여 생각하게 됐지만, 오랜 시간 함께한 이들(오래된 부부)의 삶은 지금 내 눈앞의 적당히 식은 라떼가 내게 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두 사람에게 주는 것 같다. 처음엔 두 사람의 조합이 완벽해 보이지만(혹은 그럴 것으로 믿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애매해지는, 결혼이 만들어 낸 관계 자체가 고민이 되는 순간들 말이다. 그다지 행복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오히려 각자가 혼자였던 시간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을 품지 않고 '삶은 원래 이런 것이다'라고 자위하며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강박적으로 끝까지 마시고 있는 식은 라떼처럼...
결혼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부작용에 대해서 나는 이미 중학교 때부터 깊이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었나 보다. 무려 열다섯의 나이에 결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결혼 후 반드시 각방을 쓴다'였다. 그 이유인 즉, '함께하는 시간이 오래되면 서로 예의를 잃게 된다. 사람 간의 관계에는 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란 것이 있는데, 보통 오래 함께하는 두 사람은 이 선을 넘어버리게 되므로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 없게 된다'와 같았다. 나는 당시 고민했던 이 결혼 후 관계라는 주제에 관해 친한 친구들 몇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일관된 친구들의 반응은 '미쳤다', '이해할 수 없다'였다. 4년이 지나 대학교 신입생 때도, 17년이 지난 지금도 인위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나의 주장은 보통 이상하다는 취급을 받는다. 왜 그럴까?
한국사회는 두 성인이 결혼하면,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행복이 완성되어 어린 시절 읽던 백설공주의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결말이 올 것이라 끊임없이 세뇌시키고 도덕률을 생산해낸다. 행복을 믿거나 말거나 어쨌건 절대다수는 이 사회가 제시하는 동화 속 '행복의 길'을 군말 없이 따른다. 그리고 절반의 사람들은 불행해진다(한국의 이혼율이 이를 증명해준다). 혼인한 직장상사들은 업무가 끝난 후 집에 가고 싶지 않다며 늦은 시간까지 함께 술자리를 할 것을 강요한다. 친한 친구들에게 배우자의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미혼자들에게 가능한 결혼은 늦추라고 한다. 반면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화목함을 가장한다.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직장 후배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걸어온 결혼방식과 생활이 '어른'이라면 당연히 겪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며 자랑하듯, 단정 지어 얘기한다. 보통 한국인들의 자아는 부모, 학교, 사회에 의해 통제되어 정립되며 타인 의존성이 강한 특성을 지닌 대다수는 진실에 대한 고민 없이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으니깐'이라며 의심 없이 따른다. 이런 대다수에 의해 나의 '각방론'은 중학생 때도, 30대가 된 지금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취급이다.
이상한 일이다. 누구나 그(결혼) 과정과 결과의 씁쓸함을 성장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보고 듣고 인식해 왔지만, 성인이 되어 똑같은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주변인들도 기존과 똑같은 방식을 따르도록 종용한다. 이 길을 벗어나면 부도덕의 심벌, 혹은 사회 부적응자로 취급될까 봐 두려워한다. 결국 똑같은 가시밭길을 택한다.
우리 세대에 이르러서는 변해야 하지 않을까? 진짜 두 사람이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결혼의 방식에 대해 이제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하는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싫은데 억지로 하는 삶을 택하는 것은 우리 윗세대로 끝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문장을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살아갔으면 한다.
나, 너, 그러고 나서 우리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각자의 특성을 잃지 않는 삶을 살며 적당한 교집합만을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누구나 결혼을 하면 조화롭지 못하다. 충돌이, 갈등이 생긴다. 절반의 사람들에게는 불행이 찾아온다. 끝끝내 버티면 부부라는 타이틀만 간직한 '껍데기 부부'가 되고 텅 빈 인생만이 남게 된다. 사실 조화롭지 못한 상황이 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나를 잃지 않는 것, 삶을 억지로 살지 않는 것, 적당한 우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난 여전히 17년 전, 중학생일 때 품었던 의심과 그로부터 파생된 해답, '각방론'이 정답이라 믿는다. 물론 조금 열린 답으로 변했다. 진짜 각방이 아닌, 각자의 자아에 맞는 개인을 지켜나가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 서로 존중하고, 결혼으로서 함께하는 삶은 서로가 맞는 범주의 교집합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라는 집단의 유지만이 목표가 되는 전통적인 과업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나, 너, 그러고 나서 우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결혼문화에 대한 인식인 한국사회에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