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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두연 Aug 02. 2024

[짧은 글] 고통이라는 역설

개빡쳐서 쓰는 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약 10년째 목디스크로 인해 근육통으로 고통받으며 살아온 사람, 그 근육통이 사회생활을 하며 더욱 심화되어 날개 죽지부터 목 바로 뒤골까지 올라와 심할 때는 두통과 구역질을 달고 사는, 그러한 개고통의 인생을 어찌어찌 살아가야만 하는, 거의 대부분의 나날을 파스 붙인 채로 살고, 한의원의 단골손님이며 목디스크 시술도 받았는데 나아지는 것은 없는, 진정 두려운 것이란 육체적 고통임을 잘 알고 있는 그런 불쌍한 사람이 바로 나야. 


진짜 매일매일이 고통스러워. 나는 왜 이런 나약한 몸을 타고났나. 이것이 나의 생이라면 앞으로의 남은 생이 두렵기까지 하다. 가뜩이나 예민한 성질에 육체적 고통까지 더해지니 성격은 더욱더 쓰레기 같아진다. 혼자 있을 땐 주르륵주르륵 아파서 울기도 한다. 나이를 서른을 넘겨놓고도 몸이 아파서 눈물을 흘린다.




인간이 고통으로 인해 더 나아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통에 잠식될 때, 고통이 나를 집어삼킬 삶은 흔들리고 어떤 이들은 더러 죽기도 한다. 고통이 과연 인간을 더 나아지게만 할까? 고통 없이 성장은 없고 고통 없이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것이란 헛된 욕망일까? 왜 인간은 그러한 운명의 루트를 타고났나? 이 비효율적인 서사는 여러 고전 작품의 단골 소재이다. 대표적으로 떠오는 것은 <오이디푸스>이다. 고통받는 인간, 운명의 굴레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신의 발아래 있는 나약한 인간상 말이다.


절망의 인간상으로 오이디푸스를 삼기엔, 조금의 희망은 있다. 오이디푸스는 그러한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그 운명을 자신의 발로 나아갔다. 그 운명에 멱살 잡혀 질질 끌려간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자신의 발로 걸었다 이거다. 그래서 뭐가 다르냐 묻는다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고통일지라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받아들임으로 인해 운명에 순응하는 것만이 아닌 견고한 신의 시스템의 벽에 충돌을 가능케 한다. 오이디푸스는 그 충돌을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발생시켰다. 


여컨대 내가 그렇다. 이 지긋지긋한 고통을 어떻게든 완화시키려 파스를 붙이고 한의원에 가고 요가를 하고 폼룰러를 하고 약을 타서 먹고 근육에 좋다는 마그네슘 영양제 비싼 거 사 먹고 고로쇠 물도 해마다 구해서 마신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고통에 대항하려는 나의 노력. 이렇게 몸뚱어리가 아파도 모임은 나가야 하고 보고 싶은 친구는 만나야 하며 술은 마셔야 하고 담배도 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그래야 숨을 돌린다. 이 모든 과정의 끝은 정해진 운명일지라도 내내 그 운명을 지르밟을지라도, 그 길을 행하는 나의 발자국은 나의 선택이자 충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괜찮은 것은 아니다.  나는 어젯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약을 밥도 안 먹고 삼켰고 덕지덕지 붙인 파스는 자국이 남아 살결은 누더기 같다. 또한 고통에 의미가 있긴 한 걸까 싶다. 사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이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그랬다. <행복의 기원-서은국>  인간은 자꾸 행복에 의미를 붙이려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게 반대로 들렸다. 행복하기 위해 이 고통에 자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깨달았다. 고통이 나를 나아지게 할 거야, 그래서 나는 더 건강해질 거야. 그래서 이 순간이 더 행복한 거야 하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신승리를 내내 해온 것이다. 


나는 그냥 아픈 것이다. 태어나기를 근육과 관절이 약하게 태어났고 예민하고 늘 긴장되어 있는 성질을 타고났기에 삶을 살아가며 받는 스트레스가 근육을 더욱 수축시켜 지금에 이르렀다. 수축된것은 몸 뿐만이 아니다. 몸이 아프니 정신이 온전할리 없다. 그렇다. 나는 이 사회의 진정한 병자이다! 고통받는 병자이다! 고통이 운명같다! 화가 나고 지쳤다. 그래서 애먼 오이디푸스 이야기까지 끌어다가 분노를 삭히려 애쓴다.




오이디푸스들은 오늘도 절규한다.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노라"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의 고통이 친아버지를 돌로 쳐 죽인 것도, 인간의 죄를 넘어선 패륜을 저지른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이 짊어져야 할 고통이란 무시무시한 신탁 그 자체이다. 


요즘은 고통을 숭배하리만큼 찬양하는 세상이 되어간다. 고통은 이 시대의 미학이며 청년들의 성공 스토리에 빠지지 않는 필수 요건이다. 고통 없인 설명이 안 되는 생들을 살아간다. 계속되는 삶에 다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우리는 삶을 행한 것이라기보다 당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신이 있다면... 이 운명 거두십시오 당장. 신전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으니까요. 기도를 듣지만 마시고 행하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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