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은 월급
상수역 스타벅스가 망했다.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이려나. 아침 일찍 오픈하는 카페라는 것 말고는 애정이 없어서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그나마 작업실을 정리하고 일자리를 구할 때 자주 갔었는데, 동네 카페보다는 오래 있어도 눈치가 덜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력서도 새로 쓰고 다이어리를 열어 계획을 세워본다. 힘주어 또박또박 적고는 있는데, 이게 이뤄질까 싶다. 그렇게 또 하루가 어기적 가라앉는다. 애매하게 남은 미지근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까워 쪼르륵 마셨다. 반납하는 곳에는 정리되지 않은 컵과 빨대와 접시들이 빼곡하다.
‘너희들은 제자리가 있는데, 혼자서는 찾아가지를 못하는구나.’
내가 사용한 컵을 그 사이에 비집어 넣으면서 생각했다. 가만 보니, 나도 이 틈바구니에 놓여서 멋쩍게 분리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오늘 하루가 그랬다. 잡코리아를 뒤적이다가 이력서를 쓰고, 잠시 쉬면서는 친구들의 인스타를 엿봤다. 계속 개인작업을 하는 모습이 부러워서 좋아요는 누르지 않았다. 붕 뜬 마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눈만 바삐 굴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길. 퇴근하고 매일같이 이 길을 돌아오는 상상을 했다. 여전히 마음 한편에 회사를 다니는 게 기계의 부품 같은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뒤 취업을 했다. 그런데 막상 상상 속 '부품'이 되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철컥하고 어딘가 들어맞은 내 삶이 굴러간다. 제시간에 출근을 하고 할 일을 마치면 퇴근하는 일상. 주어진 업무를 마치고 나면 일과는 분리된 나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들숨 날숨, 규칙적인 리듬에 지친 마음이 제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특히 오래간만에 받아 보는 월급. 따박따박의 마법 같은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한 뼘 정도 앞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고, 한 뼘을 모아보니 양팔을 쭉 뻗은 만큼도 그려볼 여유가 생겼다. 내가 무얼 그렇게 걱정했나 머쓱할 만큼 빠르게 회사생활에 적응했다. 제 몫을 한다는 만족감은 낮아진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주기까지 했다. 팀원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팀장님의 역할이고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지나가며 던지는 칭찬 한마디에 으쓱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걱정하던 부품의 삶이 나쁘지 않다. 이렇게나 나를 몰랐나 싶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도자기를 배우고, 피아노도 치고, 독서모임도 다녔지만, 그걸로 무언가 되겠다는 목적이 없었다. 오늘 내가 행복하고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내가 만든 그릇에 예쁘게 과일을 담아낼 수 있어서 좋다. 책을 읽고 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좋다. 좋은 것들이 쌓이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요즘. 칙칙폭폭. 인생이 굴러가는 게 느껴진다.
생각해보니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부품이고, 월급은 괜찮은 엔진이다. 말하자면 나는 엔진을 셀프로 만들려다 실패한 거였을지도. 회사를 다니기 두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다시는 작업을 하고 싶지 않을까 봐였다. 취업을 준비할 때 ‘나는 왜 그렇게 작업에 집착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를 후회의 시간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결과가 과정보다 중요한 사람이라 자꾸만 그 노력들이 헛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슬슬 다시 작업 욕심이 난다. 이번에는 쓸만한 엔진을 만들 수 있을까. 여전히 결과가 중요한 사람이지만 조급한 마음은 없다. 천천히 차근차근.
내가 그림보다 글을 더 많이 쓴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물론 그림인지 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기어코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다시, 내 꿈은 엔진 만들기가 되었다. 나만의 동력을 갖고 조금 더 자유롭게 굴러가는 무언가를 조립해보자. 다이어리를 열어서 계획을 세워본다. 또박또박 적다 보니 꼭 그대로 이뤄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