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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네 Aug 04. 2022

돈다발이 든 가방을 메고 지하철을 타는 일

<권력의 원리>를 읽고 든 생각

데이브 샤펠 / 넷플릭스에서 그의 공연을 볼 수 있다

데이브 샤펠이라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있다. 굉장히 오랫동안 기억하는 데이브의 공연이 있는데 그가 현찰로 받은 공연 페이를 백팩에 넣고 지하철을 탔던 날의 이야기다.


데이브는 앞으로 둘러멘 가방 속에 귀중한 것을 숨기려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 묘사했다. 온갖 흉악 범죄가 일어나기로 유명한 미국의 지하철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데이브는 ‘아, 여자들의 삶은 평생을 현찰이 가득 채운 가방을 메고 살아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기똥찬 비유가 기억에 남아 남사친들 눈높이 교육용 예시로 써먹곤 했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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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영업직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뢰하던 고객이 테이블 아래로 성추행을 했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가 없어 신고를 하거나 처벌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무엇보다 회사 실적의 문제로 무언가 조치를 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를 보니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 친구는 남자였다. 신뢰하던 고객님도 남자였다. 위로의 말과 함께 ‘여자들은 평생 모르는 남성을 대할 때 크든 작든 그런 폭력의 가능성을 늘 염두하며 불안하게 살아간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가 어떤 식으로든 여자의 삶을 공감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동성한테 성희롱 당하는 수치심은 그런거랑 비교가 안되지.”


어쩌면 당장 충격과 상처를 받은 친구에게는 너무 큰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이해해 보려 했지만  그래도 내 친구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것도 어쩌지는 못했다. 자신은 남성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될 리가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 기준에) 비정상적인 상황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조차 일상에 만연한 폭력의 모양을 보지 못하는 우매함에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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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돈다발’을 안고 있다. 그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말과 행동이 가지고 오는 폭력성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심지어 나의 친구는 본인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순간에도 그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지 못했다. 씁쓸하지만 내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이해가 그 친구의 상식이 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모든 사람이 데이브 샤펠과 같은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 (그것만으로 해결될 일이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누군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다는 것 만으로 힘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을 지키고 통제하는 능력, 제한할 수 있는 힘. 자연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힘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를, 무엇보다 스스로를 교육해야 한다. 그 복잡함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남녀평등뿐만 아니라 그 어떤 차별에 대한 이야기도 어린아이가 쿠키를 하나 더 먹기 위한 보챔으로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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