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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컬쳐커넥터 김도희 Apr 16. 2019

개인적 공간이 사회적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집에 대한 생각의 변화

집은 태어나서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사적인 비밀을 많이 저장해두는 곳이다. 어릴 적의 나는 내 방 곳곳에, 특히 책장에 많은 비밀을 저장해두었다. 책 사이에 용돈을 숨기기도 하고, 친구들로부터 받은 편지나 나의 조그만 일기장을 숨기기도 했다. 이런 나만의 공간이 고등학교로 진학한 이후 애석하게도 눈만 부치는 공간이 되었다. 야간 자율학습 후 밤 11시 30분경 집에 돌아오면 나는 침대에 쓰러지기 바빴고, 눈을 뜨자마자 학교로 오기 바빴다. 서울로 대학을 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각양각색의 놀거리가 많은 서울 탐험이 재밌기도 했지만, 사실 좁은 집에서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나를 자꾸 밖으로 이끌었다. 이웃과의 교류도 딱히 없고, 평균 5~6평에 이르던 작은 집은 때로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때문에 주말에도 나는 어김없이 학교 근처 카페를 찾아 집을 나왔다. '어디서 살 것인가'의 저자 유현준 건축가에 따르면 대도시에 살고, 소득이 낮을수록 집에서 한 개인이 머무는 정주공간이 좁아진다. 이 좁아진 공간을 보완하기 위해 도시 곳곳의 카페가 커피값을 받고 공간을 제공한다. 카페 유랑자 내 이야기였다. 그런데, 수년 째 카페를 찾아 유랑하던 내 생활 패턴은 스웨덴에서 살기 시작하며 깨지고 말았다. 2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으며 애정을 갖고 꾸민 곳, 바로 내 집이다. 


집은 늘 탈출하고 싶고 답답한 곳이었는데, 스웨덴에서 2년 동안 집은 누군가를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쉬고 싶은 곳이 되어주었다.

 



   집, 탈출하고 싶은 곳에서 쉬고 싶은 곳으로
23^m 의 내 방(2016-2017)

스웨덴 도착 후 집 계약을 하기 위해 학교 하우징 오피스에 들린 날, 한껏 들떴던 나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방이 너무 크고 깨끗해! 창도 정말 크고, 안에 화장실과 샤워 공간도 따로 있어. 공용 주방도 꽤나 깨끗하고 정말 넓어'. 한껏 들뜬 모습을 본 관계자는 선하게 웃으며, '많은 아시안 학생들이 처음 방을 보고 놀라곤 해'라고 말하며 그 반응들이 나와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인구 과밀화된 대만, 홍콩, 일본 등 아시아에서 온 친구들 대부분이 평균 4~5평의 공간에서 살다 주방을 제외한 평균 7평의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한 기쁨을 표출했으리라. 더욱이 주방이 방 밖으로 빠져있으니 실제 침실로 가용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넓다. 관계자는 스웨덴에서는 법적으로 한 개인이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 제공해야 하는 방 사이즈와 창의 크기 등이 정해져 있어 무작정 개미 소굴처럼 작게 지을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도록 건축과 인테리어를 위한 세부사항들이 법 조항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자취 생활 10년 동안 가장 넓은 개인적 공간을 가진 나는 처음으로 내 방을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꾸미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스웨덴에서 집은 단순히 개인을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삶의 근간을 제공해주는 물리적인 건축물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스웨덴 사람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스웨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인 IKEA도 늘 '집'만 생각해왔다고 하니, '집'이라는 공간이 스웨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의미를 지니는지 엿볼 수 있다. 스웨덴 사람들은 우리에 비해 하루 중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고, 홈파티도 많이 한다. 그들에게 집은 생활의 근간이자 사회적 교류를 위한 공간이었다. 


스웨덴에서의 라이프스타일은 집이 중심이었지만 우리와 다른 점은 집이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었다. 학교-집-체육관 이 단순한 루틴의 반복은 굉장히 지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삶의 안정감을 주었다나는 코리도(Koridoor)라 부르는 아파트에 살았다. 학생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적게는 6명, 많게는 12명의 학생들이 주방, 다이닝룸, 세탁실을 공유하는 곳인데 우리나라에도 많이 생긴 셰어하우스랑 비슷하다. 계속 자취만 하다가 생활에 필요한 부분을 공유하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공유하는 공간은 타인과 자연스레 연결될 기회를 주었다. 계획하지 않아도 주방에서 우연히 만난 코리도 친구와 저녁을 먹거나, 오랫동안 못 본 친구를 세탁실에서 우연히 만나는 등의 작은 연결이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해 주었다. 공부할 곳을 찾기 위해, 친구를 만나기 위해, 파티를 하기 위해 새로운 곳을 늘 찾을 필요가 없었다. 길 한 복판에서 휴대폰을 한 손에 들고 '조용한 카페, 맛집, 파티룸 '를 녹색창에 입력해 찾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고, 공간을 사기 위해 굳이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스웨덴에서의 집은 끼니를 해결하고, 잠을 자고, 공부를 하는 생활공간일 뿐만 아니라 생일 파티, 송년회, 신년회 등 많은 사회적 교류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집은 외부인을 품으면서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맺는 작은 사회로 변신했다.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행복을 느끼는 이 모든 것이 집에서 가능했다. 카페유랑자에서 집순이로 사는 동안 집에서의 만남은 우리가 시간에 쫓기지 않고 좀 더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누도록했더. 함께 요리를 하는 경우, 요리하는 시간부터 포함해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까지. 1차, 2차, 3차가 모두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식사 후 식기를 정리하고, 따뜻하게 구워지던 디저트를 꺼내 티타임을 가지는 시간은, 매번 다른 장소로 이동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고 분위기를 느끼는 것보다는 불편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의 불편함과 낮은 강도의 자극은 늘 띵동 하고 벨을 울리면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할 수 있는 편리함과 1차, 2차, 3차 다른 장소에서의 변화무쌍함에 익숙하던 내게 오히려 '편함(안락함)'과 안정감으로 느껴졌다. 스웨덴식으로 말하면 라곰이고, 덴마크 식으로 말하면 휘게고, 우리나라식으로 말하면 소확행이다. 자취 생활 8년 동안 요리도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 적도 거의 없는 내겐 큰 변화였다.


가장 사적인 공간인 집을 타인에게 내주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하지만 나의 공간을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일은 생각보다 매력적인 일이었다. 책장에 꽂힌 책, 냉장고에 붙여진 자석, 곳곳에 걸린 액자, 화장실에 놓인 샤워 제품과 디퓨저, 바닥에 놓인 카펫 등 개인의 취향이 녹아있는 물건을 통해 나는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취향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더욱이, 집안 곳곳에 놓인 사진이나 엽서는 상대와 더 길고 깊은 관계를 만드는 매개체였다. 오래전 사진과 엽서를 통해 상대의 과거로 여행을 하고, 현재의 모습에 닿는 행위는 과거로부터 현재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연장해주기도 하지만, 서로를 한 층 더 깊게 이해하면서 미래로 우리의 만남을 이어 주기도 했다. 집이 크든 작든, 화려하든 소박하든 간에 집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을 들여다보는 가장 개인적이고 소중한 공간인 동시에, 개인과 개인을 잇는 사회적 교류의 공간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여전히 나는 남의 집에 살고 있지만, 사는 동안 그 공간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얼마 전에는 커피를 사고, 냉장고에 과일과 채소를 채웠고, 아늑한 조명을 들여다 놓았다. 스웨덴에서처럼 외식을 줄이고, 요리를 해 먹기 시작했다. 집에 친구를 초대하거나 데이트를 하는 것도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나만의 시간을 갖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요리를 해 먹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혼자 또는 함께하는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집만큼 편안하고 조용한 곳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공간의 크기와 상관없이 공간이 주는 아늑함과 차분함만으로 마음이 편해진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나의 하루가 안정된 느낌이다. 집을 잠만 자는 공간으로 인식해온 내게,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낸 스웨덴 생활은 집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오늘은 어디 가지?' '맛집이 어디야?' 다양한 블로그 포스팅을 찾으며 만남의 장소를 물색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한 번쯤 나의 공간으로 누군가를 초대해보는 것은 어떨까? 부담스럽다면 가까운 지인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여기던 우리에게, 집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매력적인 일이다. 이처럼 늘 밖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집은 잠만 자는 공간으로 인식해온 내게,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은 집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앞으로 내가 어디에 살든 집은 나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가끔은 소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쾌적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편의시설이나 교통을 조금은 양보하더라도 인간답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 이제는 내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되었다. 그리고 집은 더 이상 탈출하고 싶은 공간이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가꾸게 되었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후 나는 집에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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