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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컬쳐커넥터 김도희 May 07. 2019

좀 더 일찍 독립했더라면 나는 어른이 되었을까?

부모와 자녀의 건강한 관계에 대하여

한국에 돌아온 내게 엄마는 엄마의 말에 반박하는 것이 너무 늘었다고 했다. 반박한다기보다 사실 다른 생각을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늘 엄마와의 토론은 말싸움으로 번진다. 한국인이니까, 나이가 있으니까, 여자니까 등 엄마가 나를 규정하는 여러 기준들이 나를 옥죌 때가 있다. 

'그건 나의 정체성을 나타나는 일부분일 뿐이지 나를 정의하는 모든 게 아니잖아'

'그래도 현실을 생각해봐라(우리 엄마는 경상도 사람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이해하고자 시작한 대화는 크나큰 의견 차이만 더욱 명확히 확인하고,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끝날뿐이다.


엄마가 하는 많은 걱정들은 내가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때문임을 안다. (엄마 기준의) 평균 결혼 적령기에 놓인 딸이 만나는 사람은 현재 없는 데다 가방끈이 길어 이제야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가 엄마는 답답한가 보다. 엄마의 계산으로 내가 언제 결혼자금을 모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보면 내 나이가 너무 많다. 

'평균적으로 지금쯤 너 나이대면 이미 결혼했거나,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도 많지 않나?'

하지만 평균은 평균일 뿐 개개인의 삶을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엄마의 평균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평균 역시 다양한 개개인의 인생의 총합을 그 수로 나눈 것에 불과하잖아. 그 평균에 조금 벗어난다고 해서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엄마에게 지지 않기 위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반박하지만 사실 마음 한편은 묵직한 삶에 대한 책임감이 나를 짓누른다.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만큼 나는 독립적인 삶을 살아왔나? 그리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 난 나이에 걸맞은 어른이 되었을까?


어른: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 네이버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책임'이란 단어가 가슴에 꽂힌다. 나는 어른일까? 그렇지 않다면 언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고백건대, 사실 난 이제야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출처: Pixa bay

스웨덴에 사는 동안 주변에서 일찍 어른이 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대학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은 나보다 조금 더 일찍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살고 있었다. 만 18세 대부분 집을 나와 독립해 살며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며, 동거를 하거나 가족을 이룬 친구들도 꽤 있었다. 자라온 환경이 너무 다르기에 우리의 삶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른 독립이 친구들의 삶에 외로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보다 상대적으로 일찍이 부모로부터 독립해 주도적으로 삶을 책임진 친구들의 모습은 귀감이 되었다.


대학 등록금, 생활비, 유학 생활비, 보증금 등 많은 경제적인 부분을 부모님께 수년간 의지해온 나로서는 100%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공부하고 자기 인생을 설계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신기했다. 사실 무상교육에, 정부로부터 한 달 동안 생활비를 지원받는 제도(스웨덴 많은 학생들은 국가로부터 한 달 평균 30만 원을 무상으로 받고, 나머지는 저리로 국가에서 대출받는다)의 혜택이 다른 이유도 컸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 심리적으로 자신의 학업과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는 내게 필요한 자세였다. 렌트비, 진로, 생활비 걱정 등 우리가 나누는 삶의 고민은 비슷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독립심은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대다수의 스웨덴 학생들이 온전히 자기 힘으로 생활하는 것과 달리, 나는 필요할 때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왔으니까. 부모님은 내 삶을 위해 자신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나는 그 빚을 갚기 위해 나를 희생하고,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또 희생하며 결국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서로에 대한 책임감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스웨덴의 부모와 자식의 독립심이 그들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내리사랑은 국적을 불문한다 해도, 부모가 성인이 된 자식을 어른으로서 인정해주고 독립된 생활을 존중해주는 모습은 내겐 조금은 낯설었다. 진로, 취업, 결혼, 동거 등 삶의 중대한 결정 앞에서 내가 주변 어른들의 많은 걱정과 간섭을 받는 것과 달리, 친구들은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독단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하고, 부모는 그 결정을 존중해 줬으며, 친구들은 그 결정에 책임을 졌다. 반대로 부모의 삶의 방식도 친구들은 존중했다. 부모는 독립적으로 노후를 설계했고, 부모가 이혼하고 새로운 파트너를 찾은 경우에도 많은 친구들은 자연스레 엄마 아빠의 새 가족과 잘 어울렸다. 부모의 선택을 존중하고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다.


스웨덴의 많은 가정이 맞벌이 가정이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아이들은 숙제, 집안일 등을 스스로 해결하는 습관을 기르며 학교에서도 어릴 적부터 독립심을 키우도록 교육받는다고 해도,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는 아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존중받는다는 안도감을 주는 것 같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어릴 때 쌓은 습관과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는 그들이 우리보다 좀 더 빨리 독립하고, 각자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때문에 부모 역시 자식이 성인이 된 이후 보다 자유로웠다. 매번 부모라는 나무 아래서 열매만 따먹은 나의 지난날들에 부모님께 미안해졌다. 


내가 좀 더 일찍 독립했더라면 지금쯤 어른이 되었을까? 부모와 자식의 건강한 관계는 뭘까? 이른 독립은 개인의 책임감을 증진시키고, 부모와 자식은 각자의 삶을 지지해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스웨덴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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