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계획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계획이 없어서 우리는 진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by 국경 없는 펜

'락 클라이밍 하러 울릉도로 가자!'


친구의 한 마디에 우리의 목적지는 울릉도로 정해졌다. 그리고 4박 5일간의 여행 목적은 단 하나였다. 울릉도에서 락 클라이밍을 하는 것. 때문에 무얼 먹을지, 어디에서 잘 지, 어떤 관광지를 돌아다닐지는 중요치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울릉도에 도착하는 것과, 클라이밍 장소를 물색하고, 클라이밍 장비를 잘 챙겨 떠나는 일이었다. 락 클라이밍이라는 단 한 가지 목표 외에 우리가 정한 것은, 서울에서 차를 타고 포항에 가서 우리가 타는 배에 차를 실어 보내고, 이틀은 캠핑을 한다는 큰 테두리뿐이었다. 이렇게 무계획으로 우리는 울릉도로 4박 5일의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에 가서 무얼 먹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볼 지 대략적인 To do List 조차 없이 울릉도 여행이 시작됐다. 우리 여행은 여백으로 가득 찼고, 우리는 그 위에 우리만의 여행지도를 그려야 했다. 무언갈 하기 위한 목적 하나만 갖고 떠난 여행은 처음이었다.


10년 전 처음 여권을 만들고, 26개국을 여행했다. 지난 여행을 돌아보면 대부분 목적지 중심이었다. 막연한 목적 없이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서 무얼 할지 인터넷, 책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열심히 정보를 모았다. 낭만의 도시 파리, 트렌드의 도시 런던, 동서양의 오묘한 조화 이스탄불 등 목적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파리에 간다 치면 루브르 박물관을 가고, 샹젤리제 거리를 걷고, 라뒤레에서 마카롱을 사 먹고, 바토무슈를 타고 세느 강변의 야경을 감상하고,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라가기 등 할 것들로 일정을 꽉꽉 채웠다. 돌이켜보면 그 누구도 내게 이것을 해야 한다고 시키지 않았지만 '유명한 곳은 가봐야지,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봐야지'라는 마음에 나는 자발적 수동적 방랑객이 되었다.


낯선 곳에서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고, 일상의 휴식을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은 인터넷이나 책에서 찾은 정보들로 여백 없이 꽉꽉 채워졌다. 우연한 만남은 우연의 매력성을 잃었고, 수많은 해야 할 것들로 여행의 휴식은 짧아졌다. 더욱이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탈출,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찾아 떠난 여행은 남들이 경험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새롭지도 않고 오히려 익숙한 것들이 되었다. 백지 위에 나만의 여행지도를 만들기보다 이미 남들이 그려 높은 여행의 지도 위에 조금 다른 색깔을 칠할 뿐이었다. 이미 그려진 길을 따라가는 여행은 보다 수월했지만 방랑객으로서의 여행의 목적엔 충실하지 못했다.


차를 화물차에 실어 보내고

반면, 이번 울릉도 여행은 무계획의 백지상태로 시작됐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우리가 예상한 대로 하나도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동해 배에 차를 싣는 일에서부터, 울릉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까지, 모든 것이 예상과 달리 진행되었다. 울릉도로 가는 배에 차를 싣자는 우리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배에 실을 수 있는 차는 하루에 단 6대였는데, 운 좋게도 딱 6번 째로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울릉도민을 위한 행사 때문에 입항하는 MBC 차량 한 대가 공문을 보낸 덕분에 한 자리를 가져가 버렸다. 때문에 우리는 7번 째로 밀려났고 차를 부랴부랴 화물선에 실어 보내야 했다. 울릉도로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울릉도를 눈 앞에 두고 우리가 탄 여객선은 바다 한가운데 1시간 40분 동안 떠 있었다. 항구에 배를 정박하는 데 필요한 접안 엔진 중 하나가 갑자기 고장 난 것이다. 굉장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방송에서는 접안 엔진을 고치지 못하면 포항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울릉도에 갈 수 있다고 하던데, 3대가 덕을 쌓지 못했으면 제 밑으로 3대가 덕을 쌓을 테니 울릉도에 가게 해주세요'.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울릉도에 있을까 했던 예인선 두 척이 나타나 우리 배를 이끌고, 해양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우리는 울릉도에 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아무것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 상황이 짜증날 법도 한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도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다. 락 클라이밍이라는 목적이 분명했기도 하거니와, 이 외에는 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조급하지도 않았다. 다만, 빈 공간의 일정은 우리의 엉클어진 계획에 맞게 융통적으로 조정되었다. 그리고 이 빈 공간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더욱 재미있게 채워졌다. 계획이 없던 덕분에 무계획을 핑계로 이야기를 튼 덕분이다.


포항 터미널에서 만난 사람들

포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는 따님이 다녀오셨다는 숨겨진 울릉도 맛집을 추천해주셨다. 터미널에서 만난 울릉도 마니아는 여행객에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캠핑장을 추천해주셨다. 인터넷 정보만 보고 대뜸 예약한 야영장보다 훨씬 아늑하고,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공짜였다! 차를 배에 못 실은 덕분에, 택시를 탄 우리는 40여 년을 울릉도에서 사신 기사님으로부터 울릉도 역사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계획 없이 떠돌다 들린 조그마한 식당에서는 울릉도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따개비 칼국수와 김치를 먹었다. 우연히 발견한 다이빙 장비 대여소에서 만난 다이빙 강사님은 장비도 공짜로 빌려주시고, 물회 맛집도 알려주신 걸 모자라, 수영 후 배고픈 우리에게 갓 끓인 짜파게티를 주셨다. 우리의 여행은 우연한 만남으로 채워졌다. 계획되지 않았던 덕분에 생긴 인연이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을 수정해야 했지만, 정해진 것이 없던 덕분에 여정의 빈 공간은 우리의 페이스에 맞춰 모양을 바꿨다. 그리고, 오히려 이 빈 공간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우리의 색깔에 맞게 채워주기 시작했다. 우리가 왜 울릉도에 가는지, 어떤 사람들인지 이야기 나누며 서로를 알아간 덕분에, 책이나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맞는 정보였다.


'울릉도 맛집', '울릉도 가볼만한 곳', '울릉도 숙소' 등 여행의 콘텐츠를 채우기 위해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녹색창을 띄운 적이 없다. 백지로 시작한 여행은 오히려 더 순조롭게 흘러갔다. 우리에게 우연적으로 다가왔던 것들을 즐겼기 때문이리라. 여행길이 막히면 막힌 곳을 지나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정해진 것이 없으니 오히려 막힘도 막히지 않은 것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1일 차, 2일 차 To Do List'의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는 여행에는 불안과 아쉬움이 늘 있었다. 계획해 놓은 것을 못 할까 봐 불안하거나, 못하면 아쉬움이 커지곤 했다. 하지만, 울릉도에서 To Do List의 목록을 하나씩 채워가는 여행은 생생한 현재에 집중하는 시간들이었다.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했으며, 최선을 다해 현재를 즐겼다. 그러자 불확실한 여행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멀리 물러나고, 현재는 내 눈 앞에 살아 있었다. 계획이 없었기에 미련도 없었다. 과거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던 나 대신, 오롯이 현재에 존재하는 내가 있었다. 비로소 나는 방랑하는 진정한 여행객이 되었다.


오늘 우리 차가 어제서야 울릉도에서 포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떠나는 날 차를 부쳤지만, 예정된 화물선이 없었다. 끝까지 우리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무사히 락 클라이밍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마무리되었다. 많은 것을 계획하진 않았지만, 그런 덕분에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았다. 목적을 이루는 데에 빈틈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빈틈에 여행지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간접 경험이 채워지면서 여행은 더 다채로워졌다. 우리의 울릉도 여행은 단색이 아닌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다.


여행의 진짜 의미는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 깃들어 있었다. 여행에는 계획이 필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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