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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컬쳐커넥터 김도희 May 19. 2020

쫄보 취준생이 터널 끝에서 얻은 깨달음

신입사원 일기3- 삶이라는 파도를 타야지

'패션'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우리는 각자 다른 단어를 그릴지도 모르겠다. 이 단어를 듣자마자 나는 항상 Passion(열정)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나도 이제는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Fashion(패션, 유행하는 스타일)을 떠올린다. 패션은 이젠 내게 밥줄이자 연구 대상이 되었다. 패션에 대해 1도 모르던 패션 고자가 패션회사 카피라이터(카피라이터도 마케터다)가 된 것이다.  '어쩌다보니'의 취업 과정은 내가 삶과 인생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지혜를 깨닫게 해주었다.


패션회사는 내가 발을 들여놓으면 안 되는 곳일 줄 알았는데.

나는 남들만큼 유행, 패션이나 유행을 선도하는 셀럽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나를 꾸미는 데 자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유행하는 아이템보다는 무난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을 즐겨 입고, 패션(Fashion, 유행) 보다는 자기 계발에 패션(Passion, 열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옷에 관심이 많은 남동생은 늘 나의 스타일을 보고, 인스타그램을 보고 옷 입는 센스를 기르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옷 입을 시간 아껴서 책 한 글자라도 더 읽겠다'는 볼멘소리를 하며, 성공의 아이콘 마크 주커버그나 스티브 잡스는 옷 고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단색의 티셔츠와 청바지를 평생에 걸쳐 입었고, 그게 그들의 상징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옷은 내게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보다 몸을 보호하는 실용적인 도구였다. '대충 입으면 되지,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에 돈을 써가며 매일 다른 옷을 입을 필요가 있나? 외면의 아름다움보단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해'라는 자기 합리화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요즘 매일, '내일 뭐 입지?'를 고민하고, 내일 입을 옷을 자기 전 준비해 놓는다. 하루의 대부분은 '사람들은 자기를 치장하면서 어떤 욕구를 실현하는 걸까? 왜 이 트렌드를 소비하는 걸까?' 고민을 하며 보낸다. 패션 회사가 사람들이 옷을 통해 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인 만큼, 구성원인 나도 내 개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옷을 싶다는 자기표현의 욕구가 일었다. 그리고 나의 업무, 즉 고객의 욕구를 이해하고 설득하는 일, 를 잘 해내고 싶은 패션(Passion)이 나를 자극했다. 패션은 어느새 내 일상이 되었다.


패션 회사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적이다. 그리고 이 우연은 무엇보다도 막연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용기, 직관에 대한 믿음과 나의 에고를 통제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고백컨대 나는 패션에 관한 무관심과 낮은 자신감 때문에 패션회사는 이력서를 쓸 때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데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인터넷의 한 구직사이트를 통해 지금 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지원할 것을 제안받았다. 평소 내가 일하면 안 되는 곳이라 생각한 산업군에서, 너무나도 구체적이면서 제한적인 카피라이터라는 직군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해외 취업을 목표로 지원서를 쓰고 있던 터라 '한국에 있는 패션회사의 카피라이터'라는 직군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우주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Pixabay

하지만 올해 취업을 준비하며 스스로 한 다짐이 오만한 내 정신을 붙잡았다. '우주가 전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오만함과 편협한 생각으로 그 어떠한 것도 판단하지 않을 것, 직관을 믿을 것'. 스웨덴에서 돌아온 후 막연한 불안감에 압도되어 방향성 없이 방황하며 현재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잊히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명상이나 에고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특히 아잔 브람 스님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라는 책에서 나눈 말씀들을 가슴에 새기던 중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스승이라는 이 스님은 책에서 계획이란 인간이 두렵기 때문에 세우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본래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인생이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세세한 계획을 세운다고.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평생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배척하지만 않나.


더군다나 나는  세상을 흑백 렌즈를 통해 바라보곤 했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나쁘고,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돼'. 본래부터 좋고 나쁨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는데... 그러니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는 게 당연했고, 많은 것에 불평불만과 걱정이 생기기도 했다. 이 불안함은 대학 졸업 후 '헬조선을 탈출해야겠다'는 목표 아래 스웨덴으로 유학을 가는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30대 여성 미취업자가 된 상황 앞에서는 불안함을 가중시켰다.


안하니 계획은커녕 삶의 방향 감각도 놓칠 수밖에. 결국에 책을 읽고, 할 줄 모르는 명상을 시작한 것도 나의 불안함을 잠재우고 내가 잘 살기 위함이었다. 완벽하게 마음을 수련하진 못했지만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이 다행히 내가 현재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잡아주었다.'자연스럽게'라는 만트라를 속으로 되새기며 현실적으로 Plan B를 세우자는 마음으로 나는 주어진 기회를 잡았다.


이력서를 제출 후 전화 인터뷰를 보고, 1차 카피라이팅 시험을 봤다. 시험을 보자마자 난 백방 떨어졌구나 생각했다. 퍼프 슬리브, 브로드리 앙글레즈 등 종이에 수 놓인 각종 패션 용어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째려보며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주어진 시험 과제를 다 완수하지 못하고 인사담당자에게 헐레벌떡 인사하고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는데, 놀랍게도(?) 2,3차 인터뷰를 볼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간절히 바라던 해외 취업에 성공해 2,3차는 준비도 없이 편한 마음으로 보았는데, 어쩌다 보니 최종 합격까지 해버렸다. 그리고 나는 패션 회사의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입사 2주 차 매일이 새로운 도전이지만 의외로 만족스러운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모르는 게 많아 배울 게 투성이고, 이 사실이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비자를 설득하는 법, 욕구 저변에 깔린 사회의 변화와 개인 및 집단의 심리를 이해하는 일 등 내가 평소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일을 하면서 가뭄난 나의 패션 센스를 기를 수 있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통해 돈을 번다는 사실도 감사한 일이다. 참 인생이란 모를 일이다.


자연스럽게 살다보면

@Pixabay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함과 두려움은 평생 우리와 함께 한다. 그래서 매번 익숙한 것을 선택하고 싶다. 인생에서 가장 자존감이 낮고 불안한 시기였던 취업 준비 시기에 서있던, 30대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불안해서 익숙한 것만 선택했다면, 지금의 나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로 구직하며 더욱 방황했을 것이다.


일을 시작해보니 '패션 회사의 카피라이터'라는 타이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이었다. 사람들의 욕구를 이해하는 것과 그리고 사람들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 결국 내가 하는 일은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었고, 그것이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구직을 할 때 직무의 적합성 외에도, 사내 문화 및 사내외 기회 등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이 많았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패션 고자에서 패션 회사 마케팅팀의 카피라이터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수많은 자기 검열과 자기 회의가 있었고, 미래에 대한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선택을 두고 2주 내내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나는 당시 직관에 따라 선택을 내렸고, 포기한 기회비용에 대한 미련은 없다. 미련을 둬봤자 뭐하나. 오히려 막 불안의 터널을 지난 지금, 나는 삶을 살아가며 다각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과, 삶의 목표는 세우되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오는 것을 감사히 받고, 힘들 때 때론 버티며 그 때 그때 내가 느끼는 바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내가 힘들때마다 많이 의지한 친구는 내게 '산짐승 처럼 살아라' 라고 말했다. 그것이 많은 현자들이 말하는 인생의 파도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자 우주가 내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닐까? 그때 비로소 우리가 생각한 우연은 필연이 된다. 마크툽.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다.


패션 고자에서 패션회사 카피라이터이자 마케터로 거듭나며 나는 삶과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내 머리와 마음에 되새겼다. 의식적으로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다시금 불확실한 인생의 길 위에서 매일 우주가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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