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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컬쳐커넥터 김도희 May 22. 2020

꿈많은 월급쟁이가 동지에게 보내는 헌사

따릉이가 보여준 월급쟁이의 꿈

야근을 마치고 지하철 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따릉이가 타고 싶어졌다. 따릉이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공유 자전거다. 퇴근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지, 회사 근처의  따릉이 10대는 이미 주인을 만나 떠나고 없었다. 굳이 지도에서 근처의 따릉이를 찾아 15분 여를 걸어간 뒤에야 따릉이를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빌리는지 몰라 앱을 켜고, 한참을 헤매다 퇴근 후 30분이 지나서야 안장에 안착했다. 이미 집에 거의 도착해 갈 시간이었다.


카카오톡 지도를 켜고 집까지의 자전거 경로와 시간을 확인했다. 1시간 15분이나 걸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카카오 지도는 톡 하고 던져주었다. 업힐과 대부분의 평지였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라 긴장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길게 걸리는 시간과 내가 타야 할 경로의 초반 경사를 보고 따릉이 반납 욕구가 순간 일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괜히 타고 간다고 오기를 부렸나?'. 하지만 마음먹고 빌렸으니 무거운 엉덩이를 안장에 안착할 수밖에.


순간적으로 일었던 반납 욕구와 무색하게도, 따릉이에 오른 지 오 분도 되지 않아 따릉이와 함께한 퇴근은 오늘 중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싶었다. 사람 마음은 참 변덕스럽다. 이랬다 저랬다. 이래서 감정에 지배당하지 말고, 조절하는 연습을 하라는 건가. 입사 후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서 앉아 일하는 탓이기도 하지만, 회사가 지하철역에 굉장히 가까운 탓에 생활 운동량이 현저히 줄었다. 지하철에 실려 왔다 지하철에 실려간달까? 나는 하루 종일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두 발에 힘을 실어 따릉이를 밟고 가르는 저녁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하고 상쾌했다. 무엇보다도 따릉이는 내가 몰랐던 서울의 얼굴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꼭 여행을 하는 기분이랄까.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사무실로 꽉 찬 많은 빌딩이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치를 보며 팀장님이 빨리 퇴근 하길 바라고 있거나, 누군가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두고 끙끙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는 집에 가면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 일부러 업무를 만들어 가며 사무실에 남아 있을지도. 입사 3주 차, 회사원이 되어서야 비로소 곳곳에서 열심히 삶을 견뎌내고 있는 동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문득 어제 잠들기  전에 본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C: Pintetest

폐간을 앞둔 유명한 어드벤처 잡지의 마지막 호 표지는 16년 간 이 표지를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던 월터의 모습을 담았다. 누군가가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 찍어 보낸 이야기 한 조각을, 또 다른 누군가는 한 평 남짓한 자신의 사무실 공간에서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다듬고 있었다. 무려 16년 간. "The last issue dedicated for people who made this(마지막 호는 이 잡지를 만들어 온 모든 사람들에게 바칩니다").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따릉이를 타고 수많은 사무실을 지나며 마음속으로 얼굴을 모르는 동료들에게 작은 인사와 위로를 건넸다. '열심히 일한 당신 덕분에, 내가 원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누리고 있어요. 때문에 이 세상에 많은 이야기가 퍼지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겠죠. 감사합니다.' 나도 월급쟁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월급쟁이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야망 가득했던 어릴 적에 나는 월급쟁이에겐 안정이 최고지, 큰 꿈이나 야망은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자기만의 길을 찾은 크리에이터의 삶을 그렇게나 동경했다. 뒤늦게 우리 모두가 무언갈 창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넉넉지 않은 월급에도 감사하며, 때로는 불합리한 근무 환경도 참아가며,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분들 덕분에 내가 많은 편의를 누리고 있다는 걸. 사무실을 환하게 밝히던 수많은 빛을 통해 수많은 월급쟁이의 꿈도 빛나고 있었다. 각자의 방식대로.


따릉이와 함께한 첫 퇴근길에 많은 동지를 만났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얼굴도 모르는, 지나가던 또 다른 꿈 많은 월급쟁이가 보낸 감사와 응원이 전달되었을까? 덕분에 나도 오늘 내 위치에서 꿈을 꾸고 최선을 다할 에너지를 얻었다. 그리고 따릉이와 퇴근하는 또 다른 저녁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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