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그와 만난 지 500일을 축하했다. 500이라는 숫자가 수년을 함께한 커플에게는 별 것 아닌 숫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연애를 회고하기엔 짧다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연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같이 살기 시작해서인지 그와 함께한 500일은 묵직하고 밀도 있게 다가왔다. 매일매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보면 500일도 그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지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일까? 그와의 첫 500일은 지난 500일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올 또 다른 수많은 날을 그려보는 시간이 되었다.
지난 500일 동안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어디로 나아갈 진 몰랐다. 다만 순간순간의 진심에 충실하고,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고, 우리에게 닥친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해결해 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했다.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고, 남자 친구는 우리 가족을 만났고, 각자의 커리어나 꿈꾸는 가정 등 미래에 대한 계획을 공유하고, 수많은 문화 차이와 사회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500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에게 부모님과 같은 외삼촌과 외숙모를 만났고, 12월 나는 그의 가족을 만나러 영국에 간다.
아직 한국에서는 가족이나 친척을 소개한다는 건 '이 사람은 저와 결혼할 사람입니다'와 같은 의미다. 그래서 외삼촌과 외숙모는 결혼이 '확정'되면 소개를 하라고 하셨다. 엄마나 동생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해주는 것과 친척들에게까지 소개하는 것은 달랐다. 하지만, 남자 친구는 영국에 가기 전에 외삼촌 외숙모를 만나 뵙고 싶다며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파트너를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일은 서로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남자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어른들께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니 나도 모르게 굉장히 조심스러워졌다. 공식적으로 약혼을 한 것도, 프러포즈를 내가 한 것도 받은 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우리의 첫 만남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외삼촌과 외숙모는 나름 흔쾌히 시간을 내주셨고, 우리의 만남은 으레 그렇듯 고깃집에서 이루어졌다. 밥 한 번 같이 먹는 캐주얼한 만남이라 생각했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외삼촌은 평소 말수가 적으셔셔, 남자 친구에게 '삼촌이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원래 말씀이 없으신 거니 오해하지 마. 마음은 정말 따뜻하신 데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르셔'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나는 그날 내가 가장 지금까지 본모습 중 가장 서윗하고 수다스러운 사랑스러운 외삼촌을 만났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외삼촌과 외숙모는 남자 친구를 아들처럼 편하게 대해 주셨다. '나 고기 진짜 잘 굽는다'며 불판을 장악한 외삼촌은 식사 내내 야들야들한 갈비를 구워 우리 접시에 놓아주셨다. 그리고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남자 친구와 한창 맥주잔을 채우며 대화를 주고받으시는 게 아닌지. 그리곤 덧붙여 '좋은 일'이 생기면 우리 집에도 놀러 오라며 한 술 더 뜨셨다. 며칠 내내 걱정했던 내 모습이 한심스러워지는 동시에, 외삼촌의 새로운 면을 만난 기분 좋은 충격과 그 시간이 너무 따뜻하고 사랑스러워 밤잠을 한참 설쳤다. 연인과 사랑하는 가족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은 성숙하고 단단한 연애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다시 한번 느낀 하루. 가족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건 쉬운 일이 절대 아니지만, 가족들은 내 생각과 달리 그 만남에 활짝 열려있을지도 모른다.
'결혼을 전제한 만남'.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참 많이 듣는 말이다. 한국에서 연애를 할 때는 결혼을 전제해야만 한 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마주한다. 가족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이 사는 문제나 경제적인 주제에 대해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떻게 연애 초부터 결혼을 전제하고 만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건 두 사람의 삶이 결합되는 일이자, 두 사람을 둘러싼 세계의 확장이다. 때문에, 가족과의 만남, 경제적 분담, 동거 등 흔히 결혼 확정 후 이뤄져야 하는 일들이 우선되어야 연애는 그다음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의 지지 덕분에 관계가 안정되는 것도 장점이다.
엄마는 외삼촌과의 만남에 대한 소식을 듣자, 자리를 잘 마련했다고 칭찬해주셨다.
'연애를 시작할 때, 그 관계를 어떻게 끝맺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인연이 아니면 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의 선택을 믿어주고,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이 궁금하기도 하다. 말은 결혼 날짜 잡으면 데려오라고 하지만(ㅎㅎ) 엄마도 몇 번 J를 만나면서 너희 둘에 대한 믿음이 더 커졌다 '
엄마는 내 남자 친구를 실제로 만난 이후, 더욱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신뢰하게 되었고 우리의 관계를 묵묵히 지지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통화 중 그에게 사랑한다며뜻밖의 고백을 했다.
'J, 사랑한다!'
엄마와 외삼촌을 위한 세레나데
외삼촌을 만나고 온 뒤 며칠 뒤, 엄마와 외삼촌의 생신이었다. 남자 친구와 함께 우쿨렐레와 기타를 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동영상으로 녹화해 두 분께 카톡으로 보냈다. 사랑한다는 낯간지러운 표현과 함께. 엄마의 생일에 맞춰 도착한 동영상에 엄마는 한참을 싱글벙글, 활짝 웃으며 동영상을 몇 번이고 재생했다.
'알았다, 오냐' 평소 단답형 카톡 천사인 외삼촌은 비디오를 잘 보았고 고맙다는 메시지와 함께 영국에 잘 갔다 오라며, 무려 4줄에 이르는 답장을 주셨다. 낯간지러운 표현은 1도 없는 건조한 메시지였지만 삼촌의 행복한 기분이 내 심장을 촉촉이 적셨다.
그와 함께한 지난 500일, 익숙지 않은 것들을 시도하고 숨기기보다 솔직하게 우리의 관계를 오픈하고 조금씩 우리를 둘러싼 주변 세계로 확장한 덕분에 우리의 관계는 매일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어떤 관계든 감출수록 오해만 쌓이고 진심으로 내 생각과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면 어떤 관계든 더욱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12월 그의 세계에서 나는 누구를 만나고, 어떤 모험들을 하게 될까? 내가 모르는 남자 친구의 세계를 마주할 때가 다가오는 요즘, 가슴이 쫄깃쫄깃 긴장되면서도 마음이 살랑살랑거린다. 내 모습 그대로, 진심으로 그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자 다짐하며, 긴장과 설렘 사이에서 일렁거리는 마음을 잠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