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오랜 친구를 만났다. 감옥 같은 입시 생활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던 스무 살의 우리는 33살의 취업 준비생이다. 33살에 재취업을 준비하는 동지의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되지만,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나눈 친구와의 대화는 새로운 출발에 대한 설렘과 의지를 활활 불지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강남 빌딩 숲 속에서 만나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가며 한참을 떠들었다. 결혼, 일, 꿈, 목표, 돈에 대한 나름의 고찰. 그것도 특히 결혼 적령기에 있는 두 취업 준비생의 이야기라면 정말 우울할 수 있는 이야기일 텐데, 고맙게도 오늘 그 덕분에 반짝 빛나는 삶의 희망을 보았다.
친구는 4년 동안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 사업을 운영하다가 올여름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약 5~6년 전 한국에서 창업 후 투자를 받아 머나먼 칠레까지 가서 사업을 운영했는데, 크진 않지만 자기 사업을 다른 회사에 매각한 경험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더 큰 점프를 위해, 한국에서 다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스펙뿐만 아니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데다, 본인의 이력과 커리어 방향 그리고 회사의 니즈를 잘 매칭 하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주변에서 오는 결혼 압박은 덤이다. 하지만, 그는 불안해하거나 좌절하기보다 오히려 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자신만의 삶의 우선순위를 세우고, 필요한 것을 배우고 도움이 되는 사람을 찾아가며, 정말 관심 있는 회사와 직무에 지원을 하면서. 말이야 쉽지, 비교와 눈치가 만연한 사회에서 자기 중심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솔직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나아가야 할 길을 안다는 것은 진정한 나를 마주하는 것이다.
바로 어제, 얼마 전 지원한 회사에서 감사히도 오퍼를 받았다. 내가 관심 있는 산업에서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콘텐츠를 기획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협업하고 성장하고 싶어 지원한 곳. 오퍼를 받으면 마냥 기쁠 줄만 알았는데, 솔직히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은 늘 두려움을 동반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엇이든 잘 해내겠습니다!' 하고 이력서를 적셔버릴 듯한 넘치는 자신감은 증발하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 회사가 나랑 잘 맞을까?', '내가 생각한 직무일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오늘 그 꼬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퇴사 후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자 노력한 만큼, 내 선택에 조금은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회사의 미래도 나의 미래도 알 수 없지만, 이번만큼은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주변에 많이 물어보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선택이 내 삶이 좀 더 선명하게끔 채도와 명도를 더해줄 것이라 믿는다. 친구에게서 받은 용기로 한 걸음을 내딛고, 또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 한다.
33살, 돌고 돌아 다시 시작점에 섰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삶은 여전히 희미하다. 그럼에도 지금 절망보다 희망이, 두려움보다 기대가 큰 이유는 과거, 현재 미래의 나를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오래토록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간만에 피어오른다. 잘난 것은 잘난 대로, 모자란 것은 모자란 대로, 원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나를 긍정하자 용기와 믿음이 나를 보듬었고, 비로소 무채색의 내 삶에 선명한 색깔 한 방울이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