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할게

드라마 <런 온> 마지막 회를 보고

by Journey


아이가 유치원을 다닌 3년 동안 대화법 공부와 강의를 위해 매주 1~3회 [대전-서울]을 오갔습니다.


아이에게 화내지 않고 말하고 싶어 시작한 공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들과 깊은 연결, 연대감을 느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일을 앞으로 평생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020년 4월 강의를 마지막으로 일을 쉬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아이 학교 입학 후 돌봄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학교 수업이 온라인으로 시작되면서 결단을 내리게 된 거죠.

유아기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아이와 24시간 함께하는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학교 수업을 온라인으로 시작하는 아이의 수업 준비를 챙기고 밥과 간식을 챙기고 나면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어요.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진 '돌밥'이라는 말처럼 밥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다시 밥때가 돌아왔습니다. 코로나에도 아이는 꾸준하게 자라서 중간중간 간식은 또 얼마나 찾던지요.


이런 시간이 오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틈틈이 새롭게 앞으로 할 일을 찾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래서 찾은 키워드가 '나다움'이었습니다. 나를 잘 알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잘 알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책도 읽고 강의도 듣고 심리검사, 강점 검사 등등을 하면서 저의 '나다움'을 찾는 동시에 어떻게 사업으로 가져갈지 생각했습니다. 낯선 SNS도 시작해보고 큰 그림을 그리고 세부적인 것들을 그려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실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의 어깨에 올려진 '가장'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보여서요.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고 나서 남편이 계속 살이 빠지고 체력이 떨어지는 게 눈에 띌 정도였어요. 그런 남편을 위해서 그의 어깨의 짐을 하루빨리 나눠가져야 한다는 조바심이 컸습니다. 마음이 급하니 아이와 가정을 소홀하게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 돌아보니 엉망인 집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걸 보니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다시 아이와 가정에 집중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제 일을 준비할 짬이 나질 않더라고요. 가정과 일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남들은 씩씩하게 둘 다 해내는 것 같은데 나는 왜 못하나 자책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나다움 동행자로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남편의 짐을 덜어주고 싶다.

아이는 엄마가 옆에 있기를 원한다.


이 모든 걸 한 번에 다 충족시키기는 어렵겠더라고요.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가정과 일의 균형 맞추는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사람은 다 다르잖아.
다른 게 틀린 건 아니잖아."


드라마 <런 온> 고예준의 대사처럼 다른 게 틀린 건 아니니 남들이 어떻든 나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가는 것, 그것 역시 나다움이겠지요. 놓치고 있던 저의 속도와 방향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체력이 떨어지는 건 나이와 운동 부족 때문이고 살이 빠지는 건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빨리 돈을 버는 거라고요.


정말 그러한가?

제가 서울 가느라 새벽 첫 기차를 타러 집을 나서고 나면 엄마를 찾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아침식사를 챙기고 등원을 시키는 건 오롯이 남편의 몫이었습니다. 평일에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나서도 제가 강의를 가는 주말 내내 하루 종일 아이를 케어하고 집안일을 한 것도 남편이었습니다. 종종 힘들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남편은 저와 가정을 위해서 묵묵히 그 일들을 해나갔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가정 경제를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의 에너지가 바닥을 치는 상황이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강의한 3년간의 열정은 남편의 에너지를 하얗게 불태웠기에 가능했다는 것을요.


"나 미국 못 가겠다."

"이거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에요."

"할리우드 진출? 그거 앞으로도 할 수 있어, 내가 연기하는 한.
근데 내 자식이 상처받는 건... 내가 애들 내팽개치고 얻은 영광이 몇 개인데...
내일 할게, 배우."

드라마 <런 온> 16회, 육지우 배우와 매니저의 대화


육지우 배우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습니다.

제가 정말 원하는 건 '어느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가정'이라는 것을요.

남편의 에너지를 다시 채우고, 아이가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게 지금 제가 집중할 일이라는 것도요.

저에게 맞는 방식과 속도를 찾은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자신을 위해 돈 쓰는 걸 아까워하며 별다른 취미가 없다던 남편이 취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살고 싶은 집의 평면도를 그리기도 하고 수채화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리는 남편의 얼굴이 편안해 보입니다. 숨 쉴 틈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남편의 에너지도 차오르겠지요.


저 역시 읽고 공부하고 쓰고 걷는 일, 저를 위한 일을 놓지 않고 계속하고 있습니다. 가정에 집중하기로 한 제 결정이 희생이 되지 않기를 바라거든요.

제가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놓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매일 조금씩 천천히 준비하고 있습니다.